[이태원 참사 1주기: ⑤집단 트라우마 극복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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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희생자 유예은의 어머니 박은희씨는 "1주기가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날'이 돌아왔다는 사실은 대형재난 사고 유족이나 생존자들의 트라우마를 증폭하고, 사고를 떠올리는 모든 이들에게 당시의 처참한 심정을 생생하게 소환하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한국일보는 이태원 참사 피해자들을 가까이서 지켜본 임상심리사들의 자문을 얻어, 참사의 후유증과 집단 트라우마를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봤습니다.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를 겪고 나면 많은 것들이 변합니다. 세상은 안전하고 예측 가능하다는 굳건한 믿음이 박살 나는 경험을 하게 되죠."
이태원 참사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수십 명을 지켜본 임상심리전문가 백소영씨의 말이다. 생존자와 희생자 유족은 물론 구조활동을 한 소방인력과 의료진, 취재 기자들까지, 참사와 연관된 이들이 공통적으로 털어놓은 상처의 뿌리는 상식적 세계관의 파괴에 있었다. 백씨는 17일 "출·퇴근 인파로 꽉 찬 지하철만 보고도 공포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며 참사를 떠올리는 트리거(방아쇠)가 일상 곳곳에 널려 있다고 진단했다.
참사 1년, 대한민국의 트라우마는 치유됐을까. 심리상담가들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한국상담심리학회 소속 상담심리전문가 김경선씨는 "참사와 관련 없는 내담자들도 하나같이 심리적 고통을 호소했다"며 "이태원 거리에서 청소하던 분들, 역에서 근무한 분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참사 장면을 목격한 분들 등 수많은 시민이 제대로 된 치유 없이 현재를 버텨내고 있다"고 말했다. 명시적 자각만 하지 못했을 뿐 참사의 아픈 기억이 여전히 삶을 괴롭히고 있다는 얘기다.
'2차 가해'라는 직접적 고통에 노출된 유족과 생존자의 상처는 특히 크다. 김씨는 "'아직도 이태원이냐' 등 온라인에 난무하는 혐오를 마주하고 소리를 지르는 유족도 있고, 아예 집 안에 틀어박혀 숨은 사람도 있다"며 "남겨진 가족을 챙기느라 본인의 슬픔을 꾹꾹 눌러 외려 트라우마가 커진 사례 역시 많다"고 지적했다. 백씨도 "곱지 않은 주변의 시선에 참사 당일 이태원에 갔다는 사실 자체를 함구하고 끙끙 앓는 분들을 여럿 봤다"고 했다.
"섣부른 위로는 금물, 일상 보듬어줘야"
상담가들은 참사 1주기라는 계기가 그날의 트라우마를 다시 환기시키는 기폭제가 될 수 있는 만큼, 주변을 더 세심히 돌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씨는 "일하는 분들은 근태나 대인관계 문제가 발생해 갈등이 잦아지거나 대화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자신과 타인의 변화를 면밀히 관찰해 이상 조짐이 보이면 전문상담가 등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좋다"고 권했다.
혹여 끔찍한 기억을 떨쳐내지 못한 유족이나 생존자를 만났을 때에도 과도한 위로는 금물이다. 백씨는 "진짜 힘든데 '힘내, 이겨낼 거야' 이런 류의 말을 들으면 외려 고립감이 배가될 수 있다"며 "대신 밥은 먹었는지, 대화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일상을 챙겨주는 일이 더 효과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장기간 지속되는 집단 트라우마의 극복을 개인에게만 맡겨서도 안 된다. 정부 차원의 정책 대안은 필수다. 김씨는 "수많은 죽음이 왜 일어나야 했는지, 명확한 답을 내놔야 불신의 골을 조금이나마 메울 수 있다"고 풀이했다. 백씨도 "이를테면 '톱다운(하향식)' 방식처럼 국가가 트라우마 고통을 중히 여긴다는 신호를 보내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문제라는 자각이 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트라우마를 이겨내려면 상처를 나눠야 해요. 힘들다고요? 심리적·의료적 지원이라도 받으세요. 그래야 좋아질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이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면 누군가 내민 손길을 뿌리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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