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1주기: ③살아남은 자의 슬픔]
편집자주
이태원 생존자 인터뷰는 기자들에게도 힘든 일이었습니다. 섭외도 어려웠지만 참담한 현장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이들을 마주하고 ‘그날’에 얽힌 질문을 던지기는 더 미안했습니다. 그러나 생존자들은 꿋꿋하게 응했습니다. 이들은 희생자를 대신해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생존자들이 트라우마를 무릅쓰고 세상을 향해 던지고 싶은 메시지는 과연 무얼까요? 그날 이후의 이야기를, 생존자들로부터 1년 만에 들어봅니다.
"우리 간만에 사람 구경이나 가볼까?"
토요일 오후. 둘은 함께였다.
웨딩플래너 상담을 마치고 핼러윈 축제 구경을 하자며 나선 길이었다. 3년 전인 2019년 핼러윈. 함께 코스프레 복장을 하고 찾았던 그 거리의 활기가, 두 사람 발길을 이태원으로 잡아끌었다. 코로나를 보내고 처음 맞는 핼러윈은 또 얼마나 재미있을까. 설렜다. 부부가 돼 있을 1년 뒤 이맘때를 상상하며 걸음을 옮겼다. 둘이 함께 한 그 숱한 날들과 다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어느 가을날의 데이트였다.
이태원역에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악몽은 시작됐다. 좁은 골목에 수천 명이 꽉꽉 들어차, 예비신부는 예비신랑 눈 앞에 선 채로 의식을 잃었다. 그는 오도가도 못하는 인파 속에서 그녀의 이름을 처절하게 부르며 40분 간 구조대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일요일 새벽. 그는 혼자였다.
그 잔인한 현실을 예비 처가에 알리려 휴대폰을 들어야만 했다. 2022년 10월 29일은, 그렇게 서병우(32)씨를 집어삼켰다.
"이따금 악마 같은 존재가 나타나 제게 욕설을 퍼붓는 느낌이 들어요."
(이태원 참사 생존자 서병우)
지난해 핼러윈을 앞둔 이태원엔 친구나 연인, 가족과 함께 한 사람들이 많았다. '생존자가 곧 유가족'인 경우가 흔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을 포함해 그날 폭 3.2m 골목엔 수 백, 수 천명이 뒤엉켰다가 간신히 목숨을 구했지만, 한 달 반 뒤 발표된 정부 집계에서 부상자는 320명에 그쳤다. 의료 지원을 받지 않은 나머지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마음의 상처와 살아남은 자의 죄스러움을 안고, 그러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제각기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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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 지났다. 생존자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한국일보에 어렵게 안부를 알린 3명의 청년은 여전히 무거운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를 호소하며 고립감에 압도돼 있었다. 사회생활에 지장을 겪거나 가족과 소통이 단절되는 것 역시 공통적인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모두 유가족이 바라는 진상 규명이나 세상이 바라는 참사 방지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자신들이 목도한 그 믿을 수 없는 참혹한 장면들을 복기하려 애쓰고 있었다.
PTSD에 무너진 일상
김초롱(33)씨도 살아남았다. 초롱씨가 이태원에서 핼러윈을 즐긴 건 2016년부터였다. 너도나도 재치있는 복장을 하고 모르는 사람과 깔깔거리는 분위기가 좋았다. 핼러윈은 그에겐 서늘한 가을을 기대하게 만드는 즐거움이자 기쁨이었다.
"그날따라 깜찍한 분장을 한 아이들이 눈에 띄었어요. 그러다 오후 10시 40분, T자형 골목에 갇혔다가 겨우 빠져나왔는데 앞에 사람이 깔려 죽었다는 경찰의 말이 믿기지 않더라고요."
바로 옆 가게로 몸을 숨겼지만 초롱씨 일행이 바깥 상황을 정확히 인지한 건 자정 무렵이 다 돼서 였다. 귀 따가운 사이렌 소리와 사람들의 절규를 뚫고 집에 도착하자, 안도감보다 온갖 트라우마 반응이 몸을 휘감았다. 그날 이후 한겨울에도 손발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땀이 나 양말을 챙겨 다녔야 했고, 심각한 이명과 무기력증에 시달렸다. 혼자 술에 취해 구토를 하고 기억이 끊기는 밤도 잦아졌다.
다중밀집장소를 꺼리게 된 건 생존자들이 호소한 공통 증상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서병우씨는 참사 현장에서 지갑도 함께 잃었다. 새 지갑을 사려고 백화점 갔다가 바글거리는 쇼핑 인파를 본 순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공포가 밀려왔다고 한다. "초반엔 지하철 타는 것도 힘들어 출퇴근이 어려웠어요. 그나마 지금은 많이 좋아진 편이죠." 병우씨가 말했다.
초롱씨라고 다를까. 참사 전엔 한 달에 두세 번씩 즐기던 페스티벌이었지만, 1년 간 발길을 싹 끊었다.
가족도 나누지 못할 고독
"참사 다음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게시물을 삭제했어요. 전날 이태원에 간 걸 사람들이 알면 손가락질할 거 같았거든요." 초롱씨를 가장 힘들게 한 건 죄책감과 외로움이었고, 지인들 역시 끔찍한 사건을 겪은 초롱씨에게 선뜻 위로를 건네지 못했다.
생존자의 고독과 죄책감은 가족끼리도 공유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었다. 난생 처음 식구들과 이태원을 갔다가 누나를 잃은 박진성(26)씨는 "슬픈 감정이 울컥 올라와도 가족들끼리는 힘든 얘기를 털어놓지 않는다"고 말했다. 초롱씨는 "유가족과 달리 생존자들끼리는 (서로의 존재가 참상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만나기 쉽지 않다"고 했다.
고립감이 쌓이면 우울로 이어지고, 생계에도 지장을 주게 된다. 진성씨는 "장례를 치르고 곧 복직을 시도했지만 끝내 포기하고 올해 8월 다른 직군의 일자리를 구했다"면서 "내가 이태원 참사 생존자라는 사실을 회사 동료가 몰랐으면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 말했다. 초롱씨는 기억력과 업무능력이 떨어지면서 회사로부터 '일을 쉬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공감 못하는 정부와 사회에 분노"
이태원 참사의 마지막 159번째 희생자는 용산구 이태원이 아닌 마포구에서 발생했다. 참사 당시 40분 넘게 인파에 깔려 있다가 구조된 16세 이재현군이었다.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 보름이 지난 비 내리는 겨울밤. 재현군은 "먼저 간 친구들이 그립다"는 유언을 남긴 채 숙박업소에서 홀로 목숨을 끊었다.
서병우씨는 재현군이 죽은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그땐 참사의 책임을 희생자나 생존자에게 돌리는 '2차 가해'가 온∙오프라인에서 극에 달하던 때였다. 한 지방의원이 SNS에 '나라 구하다 죽었냐'는 게시글을 올린 시점은 재현군이 목숨을 버리기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병우씨는 말했다. "약혼자 가족이 없었다면 저도 같은 선택을 했을 지 몰라요. 지난 1년간 절 가장 힘들게 한 건 사회적 비난과 조롱이었어요."
상처와 정면으로 마주한 생존자들
정부도 공감해 주지 않았다. 재현군이 떠난 지 사흘 뒤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국무총리는 재현군을 두고 "좀 더 굳건하고 치료를 받겠다는 생각이 강했으면 좋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정부 지원은 부족하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했다. 누나를 보낸 박진성씨는 "나라에서 안내한 국가트라우마센터에 전화를 걸어봤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은 데다가, 정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 도움 받기 싫은 마음도 컸다"고 말했다.
이런 분노는 결국, 사건을 떠올리기조차 싫었던 생존자들의 입을 열게 만들었다. 병우씨와 진성씨는 '이태원 참사 작가기록단'이 작업한 구술집에서 자신들이 겪은 피해 사실을 증언했다. 초롱씨는 온라인에 연재했던 심리상담기를 기반으로 이달 '제가 참사 생존자인가요'를 출간했다. 초롱씨는 "혐오가 낳은 존중의 부재, 세대간 갈등 등 한국의 사회문화적 요인이 참사의 중요 원인이란 점을 짚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들의 상처는 현재진행형이다. 하루에도 몇 번 죽음을 상상했다고 고백할 정도로 위태로운 때도 많았다. 한국일보와의 대면 인터뷰가 부담스러워 서면이나 유선으로 겨우 이야기를 나눈 일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서로에게 건네는 당부는 오직 한가지였다.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외롭게 슬퍼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 잘못이 아닙니다. 힘드시겠지만 건강히 살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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