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서 박인아 경위 인터뷰
집요하게 괴롭힌 동료들 2차 가해
경찰청은 "비위 아냐" 결론
"파출소장 중징계·2차 가해자 재조사"
"약자를 보호한다는 경찰이 갑질, 강제추행 피해 직원에 대한 2차 가해를 방치하고 있습니다. 2차 가해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누굴 보호합니까.”
16년 차 경찰인 서울 성동경찰서 소속 박인아(43) 경위가 '피해자'로 지낸 6개월은 악몽 같았다. 그를 지역 유지에게 데려가 과일을 깎게 하는 등 갑질을 했던 파출소장 A씨는 여태 제대로 된 징계조차 받지 않았고, 박 경위는 동료들의 집요한 2차 가해에 시달려야 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경찰청 감찰 조사 결과를 최근 통보받은 그는 다시 한번 무너졌다. 경찰청은 A씨를 징계하라고 결론 냈으나 2차 가해자들은 "비위가 없다"고 했다. 그는 26일 한국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앞으로 갑질 조사를 이렇게 허술하게 해도 된다고 경찰청에서 인정해준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소장님 밥 안 챙기냐"로 시작된 비극
A씨의 갑질이 시작된 건 지난 3월이었다. 당시 성동경찰서 금호파출소에서 근무하던 박 경위는 파출소 관리반으로부터 ‘소장님 밥 안 챙기냐’는 말을 들은 후로 A씨의 점심식사에 동행하게 됐다. A씨는 근무성적평정(근평)을 무기로 40분 넘게 걸어가야 하는 식당에서 식사한 후 실내암벽장에서 암벽 등반을 강요하기도 했고, 관내 80대 지역 주민 B씨와의 점심 자리에 참석하도록 했다. B씨는 박 경위를 ‘파출소장 비서’라고 부르며 과일을 깎도록 했고, 손을 잡고 끌어안기도 했다. A씨는 B씨를 ‘회장님’이라 지칭하며 “회장님 호출이다” “승진시켜 준다고 한다”며 박 경위를 불러냈다.
이후 박 경위가 A씨의 식사 제안 등을 거부하자 이유 없이 동료들 앞에서 소리를 지르며 망신을 주기 시작했고 “다른 곳으로 발령 내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참다못한 박 경위는 지난 5월 성동경찰서 청문감사실에 진정서를 내 문제제기를 했다. 그는 자신과 사무실 내 책상 거리가 1m 정도밖에 안 되는 A씨와의 분리 조치를 요청했지만, 한 달 후 얼굴만 겨우 가려지는 파티션이 설치된 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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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디기 힘들었던 박 경위는 결국 두 달간 병가를 냈는데, 이 기간 A씨는 불법으로 사무실 폐쇄회로(CC)TV를 열람해 박 경위를 근무태만 등으로 역진정하기까지 했다. 또 서울경찰청의 감찰 조사를 받은 A씨는 징계위원회에 회부조차 되지 않는 가벼운 처분인 ‘직권경고’를 받는 데 그쳤다.
결국 박 경위가 지난 7월 실명까지 공개하며 이 문제를 공론화하자 경찰청은 그제서야 서울청과 성동서에 대한 감찰 조사에 착수했다. 석 달 넘게 조사를 벌인 경찰청은 지난 19일 A씨에 대해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부당한 지시·요구에 해당해 갑질 비위가 인정된다”며 서울청이 징계하라고 결정했다. 하지만 동료들의 2차 가해는 비위로 인정하지 않았다. B씨는 지난 8월 강제추행 혐의로 검찰에 기소됐다.
"여자가 '을질'한다"...2차 가해도 홀로 대응
A씨에 대한 진정을 제기한 후 박 경위가 더욱 견디기 힘들었던 건 동료들의 2차 가해였다. 그가 병가 후 복직했을 때 한 동료는 "(병가 다녀와서) 얼굴만 좋아졌다"고 비아냥댔고, 옆에 있던 다른 동료가 "그만 갈구라(괴롭히라)"고 제지하자 해당 동료는 "갈궈서 쫓아내 버리겠다"라고 말했다. 박 경위가 다른 동료에게 2차 가해로 인한 고통을 호소한 통화녹취록을 경찰청에 제출했지만 증거로 인정되지 않았다.
박 경위는 “갑자기 하는 말을 어떻게 녹음하느냐”며 “감찰 조사를 그냥 깜깜이로 진행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서울청의 한 경찰은 갑질 사건 후 우울증 약을 복용한다는 사실을 털어놓은 박 경위에게 “우울증 약은 나도 먹는다”고 말했고, 이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들에게 "박 경위 세평을 조사해 보라"며 박 경위에게 문제가 있다는 듯한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온라인 2차 가해도 심각했다. 지난 7월 박 경위에 대한 언론보도가 나가자 14만 명의 경찰 구성원들이 보는 내부 게시판 ‘현장활력소’에는 박 경위를 비난하는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박 경위가 ‘을질’로 파출소장을 괴롭히고 있다”, “여자가 피해자를 가장해 ‘을질’에 나섰다”는 등 막무가내로 박 경위를 비난하거나 남녀·세대 간 갈등을 부추기는 글들이 올라왔고, “박 경위가 나한테도 진정을 넣었다”는 등 허위 사실을 담은 글들도 있었다.
이 게시판은 근무 부서와 실명을 밝히고 글을 작성하는 곳인데도 거리낌 없이 2차 가해를 한 것이다. 박 경위는 “실명으로 저런 말들을 하니까 더 상처를 받게 되더라”며 “자신이 2차 가해자인 줄도 모른 채 실명으로 당당히 말하는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약자를 보호하겠다는 거냐”고 지적했다.
하지만 2차 가해에 대한 대응 역시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박 경위는 “청문감사실에 얘기했더니 ‘이게 왜 2차 가해냐’며 담당자가 한숨을 푹푹 쉬었고, 경찰청에서도 이런 글을 관리하지 않았다”며 “결국 제가 그런 글 쓴 사람들에게 ‘2차 가해’라고 일일이 다 얘기해서 지금은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그는 파출소장인 A씨를 옹호하는 글을 20건 넘게 쓰며 집요하게 괴롭힌 한 경찰에 대해 진정을 넣었지만 사건 진행이 안 돼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한 상태다.
경찰 내 성희롱·성차별 만연..."중징계로 문화 바꿔야"
여성단체들은 박 경위 사건을 남성 중심주의가 강한 경찰 조직에서 일어난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이라고 보고 있다. 한국여성민우회를 비롯한 23개 여성단체들은 지난 25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성차별 사건 징계 촉구 기자회견'을 열고 "A씨에 대한 형식적 징계로 마무리하거나 2차 가해를 인정하지 않으면 경찰 내 성차별적 조직 문화는 근절되지 않을 것"이라며 A씨에 대한 엄중 중계, 2차 가해 동료 재조사 등을 촉구했다.
또 여전히 경찰 내 성희롱, 성차별로 고통받는 여성 경찰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한국여성민우회가 받은 익명 제보에 따르면 “오빠라고 한 번만 불러주면 소원이 없겠다” “은근 글래머다” 등 성희롱 발언, “체포술을 가르쳐준다”며 팔과 어깨를 주무르는 신체 접촉, “여성 경찰관은 야간근무를 안 하려고 한다” “육아휴직 여러 번 다녀오면 남자 경찰들에게 미안하지도 않냐” 등 성차별 발언 등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박 경위는 “이번에 이런 것들을 싹 끄집어내서 경찰 문화를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 A씨에 대해 반드시 강등 이상의 중징계가 내려져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박 경위는 “A씨는 나에게만 한 번 실수한 것이 아니라 주변 동료 중에 그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직원이 많지만 여태까지 조직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며 "절대 온정주의가 있어서는 안 되고, 갑질을 하면 퇴직을 앞두고도 강등이나 파면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A씨는 올해 12월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 서울청은 다음 달 초 A씨에 대한 징계위를 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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