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정 '고통 구경하는 사회'
편집자주
사회가 변해야 개인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때로 어설픈 희망을 품기보다 ‘사회 탓’하며 세상을 바꾸기 위한 힘을 비축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민낯들' 등을 써낸 사회학자 오찬호가 4주에 한번 ‘사회 탓이 어때서요?’를 주제로 글을 씁니다.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수강과목마다 ‘페이퍼’라고 불리는 소논문을 제출해야만 했다. 매주 책과 논문을 읽으며 수업 따라가기도 버거운지라 학기말이 되면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들끼리 서로의 진도를 물으며 한숨 쉬곤 했다. 주제가 정해져도 문제는 방법론이었다. 통계를 사용하기엔 이미 늦었고 참여관찰이나 인터뷰는 체력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마다, 듣거나 뱉는 말이 있었다. “할 거 없으면, 언론기사 분석 해.”
미디어는 무엇을 어떻게 드러내는가, 이 질문을 던지는 학위 논문은 정말 많다. 수백, 수천 건의 기사를 해체하고 해독하는 담론분석도 마찬가지다. 두 가지 배경이 있다. 언론은 공공성과 무관할 수 없는 ‘합의된’ 사회제도이기에 늘 감시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국 언론은 비판적으로 접근하기에 너무 좋은 소재다. 대학원생들이 억한 심정에 난도질하는 게 아니라, 찌르고 찔러도 찌를 게 무수하다.
기사들은, 기득권의 시선을 대변한다. 부자의 눈으로, 남성의 관성으로, 관리자의 처지에서, 기업의 입장에서, 서울의 탐욕으로, 도시의 감각으로, 강대국의 위치에서 대상을 그려내며 편견을 재생산한다. 종일 뉴스만 보는 사람이 성장해야 좋은 사회일 거다.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을수록 개인의 성찰이 깊어지는 게 좋은 사회일 거다. 개인이 미디어 덕택에 토론을 숙성시키고 양질의 여론을 생산하게 된다면 공동체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다. 우리는, 그러한가?
'고통 구경하는 사회'는 언론의 한계를 짚음과 동시에 균열을 고민하는 기자의 반성문이다. “'타인의 고통' 속편 같은 책”(신형철 문학평론가), “수전 손택 이후엔 김인정이 있다”(이슬아 작가)라는 추천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재현의 딜레마’를 복합적으로 보여준다. 기자가 목격한 것이 글과 사진으로 재현되는 사이에 던져야 할 질문이 빈약하면 대중들은 타인의 고통을 동물원에서 관람하듯이 구경‘만’ 하게 된다.
사실을 보도했을 뿐이라고 하겠지만, ‘자신들과 닮은 윤리’에 이끌릴 수밖에 없는 사람의 속성이 어찌 기자라고 예외이겠는가. 약자를 취재했다고, 사회문제를 추적했다고 공공성이 보장되진 않는다. 가난한 사람의 ‘역경극복’에 감동하는 버릇을 성찰하지 않으면 기사도 비슷한 것만 선별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뉴스를 보면 볼수록 역경에 좌절하는 이들을 향해 의지부족이라며 손가락질하며 가난이라는 사회구조는 망각한다. 마약에 중독된 이들을 카메라에 잘 담은들, ‘어휴, 마약이 저리 무섭다’라는 생각이 영상을 본 이들의 소감 전부라면 그건 ‘마약중독자들을’ 바라보는 편견만을 강화시킬 거다.
기자만이겠는가. 타인의 이야기로 사회의 한 면을 들춰내는 사람들이라면 늘 의도와 다르게 전달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왜곡은 자신이 선택한 단어 하나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에 항상 찝찝해야 한다. 이 찝찝함의 크기가 곧 공공성의 두께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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