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등에서 수건, 침구류 수거해 실과 원단으로 재생
AI가 버리는 옷 자동 분류해 재생하는 시스템도 개발
때로는 사진 한 장이 많은 것을 바꾼다. 2021년 뉴욕포스트에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곳으로 꼽히는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 사진이 실렸다. 너무 건조해 미생물조차 살지 않고 동물의 사체도 썩지 않는 이곳에 거대한 쓰레기 산이 있다. 인공위성 사진에서도 흰 띠를 이루는 쓰레기 산은 전 세계에서 버린 의류 폐기물이다. 뉴욕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매년 전 세계에서 버린 5만9,000톤의 중고와 재고 의류들이 칠레로 들어간다. 의류 상인들이 그중 쓸 만한 2만 톤가량의 의류를 골라내 다시 팔고 나머지 3만9,000톤을 사막 한가운데 버린다.
이 사진은 제주에서 신생기업(스타트업) 제클린을 창업한 차승수(51) 대표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잘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창업한 그는 전 세계 골칫덩이가 된 의류 폐기물을 줄이는 방법은 재생뿐이라고 봤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호텔에서 버리는 수건이나 침구류 등을 실과 천으로 되살리는 재생 사업이다. 이색 재생 사업에 뛰어든 그를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사에서 만났다.
대기업 그만두고 이혼 위기 겪으며 ‘나까마’ 생활
시작은 드라이클리닝을 하지 않는 친환경 세탁 사업이었다. "기름으로 기름때를 지우는 드라이클리닝은 석유용제를 사용하기 때문에 오염된 기름을 배출해 환경을 오염시키죠. 그래서 비싼 친환경 세제를 이용해 물세탁만 해요."
SK플래닛에서 콘텐츠 사업을 담당했던 차 대표는 사업을 하고 싶어 알아보던 중 숙박업소에서 세탁을 외부에 맡기는 것을 발견했다. 시장 조사 후 이왕이면 세탁 물량이 많은 호텔과 고급 펜션을 상대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보고 2017년 제주에서 세탁 사업을 시작했다.
제주에서 창업한 이유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다. "제주는 무려 8,000개 숙박시설이 대부분 해안가 순환도로를 중심으로 모여 있어 다른 지역보다 세탁물 수거와 배달이 오래 걸리지 않아요."
그러나 사업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제주에 내려가 낡은 중고 승합차를 하나 사서 직접 몰고 다니며 명함을 뿌렸고 연락이 오면 찾아가 세탁물을 수거해 세탁 공장에 맡기는 '나까마'(중간상) 일을 혼자 했어요. 차에서 잠자고 건물 화장실에서 세수하며 살았죠."
그렇게 아내, 두 아들과 떨어져 혼자 힘들게 6개월 일하고 손에 쥔 돈이 불과 600만 원이었다. 그 바람에 이혼 위기도 여러 차례 겪었다. "아내뿐 아니라 집안 사람들과 주변 지인들까지 멀쩡한 직장 놔두고 힘든 사업을 왜 하냐며 모두 반대했어요. 결국 접기로 했죠."
그런데 그 순간부터 의뢰물량이 폭증했다. "6개월 고생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불과 1년 만에 1억 원 넘는 돈을 벌었죠. 사업을 포기할 수 없게 됐어요."
국내 최초로 숙박 폐기물을 실과 천으로 재생
이때 차 대표는 숙박업소 폐기물 재생에 관심을 갖게 됐다. "세탁 사업을 하며 호텔 등 고급 숙박업소들은 수건이나 침구류에 기름, 피 등 오염물질이 묻으면 폐기하는 것을 발견했어요. 이를 다시 살릴 수 없을까 고민했죠. 마침 언론 보도를 통해 칠레 아타카마 사막과 의류 쓰레기를 강에 버리는 가나 이야기를 봤어요."
그래서 기존 세탁업 외 새로 뛰어든 분야가 국내 최초의 숙박업소 폐기물 재생 사업이다. 그는 지난해 1월부터 숙박시설에서 나온 세탁 폐기물을 실과 천으로 되살리는 친환경 사업을 시작했다.
재생 과정은 제주, 대구, 광주 등 전국 여러 곳을 도는 고단한 절차를 거친다. 우선 호텔과 고급 펜션 등을 매일 돌며 버리는 침구류와 수건 등을 수거한다. "제주 해비치호텔, 롯데호텔, SK핀크스 등 5성급 호텔과 고급 펜션 등 200개 거래처에서 수건, 시트 커버, 베개 커버 등 면 제품 위주로 폐기물을 수거해요. 모텔 침구류는 면 100% 제품을 사용하는 고급 호텔과 달리 다른 소재를 섞는 혼방(CVC) 제품이 많아 재생 품질이 떨어져 수거하지 않아요. 이렇게 수거하는 폐기물이 월 2톤가량 되죠."
수거한 폐기물을 세탁해 봉제실을 없애고 오염물질을 빼내는 해체 작업을 한다. 이후 대구 섬유개발연구원에서 잘개 쪼개 솜을 만드는 파쇄 작업을 거친다. "파쇄 작업을 외부에 맡기는 이유는 독일산 장비가 1억~20억 원에 이를 정도로 비싸기 때문이에요."
비닐봉투 대체하는 친환경 쇼핑가방도 만들어 공급
새로 부활한 솜은 전남 광주의 일신방직으로 이송돼 실로 다시 태어난다. 이후 다시 대구 원단공장으로 이송돼 천이 된다. "원단도 가로세로로 짠 평직과 뜨개질하듯 교차해 짜는 환직 등 두 가지로 나와요. 이 원단을 이용해 호텔용 베개 커버, 욕실 발매트, 수건, 침대 시트, 의류 등을 만들 수 있죠."
마침 차 대표는 인터뷰 당일 나온 환직 원단을 가져왔다. 그는 이날 이 원단을 들고 투자업체들을 만나기로 했다. 원단을 만져 보니 안쪽이 부드러웠다. "환직 원단은 후드티와 티셔츠 등을 만들 수 있어요. 현재 이를 이용해 카카오메이커스와 셔츠를 만드는 작업을 논의 중입니다."
원단은 연한 베이지색이다. 차 대표는 환경을 위해 일부러 원단을 하얗게 만들지 않았다. "면의 원래 색깔을 그대로 유지해 재생해요. 하얗게 만들려면 염색과 세척 과정을 거쳐야 해서 물을 써야 하고 폐수가 발생하죠."
일부 원단은 친환경 쇼핑가방으로 제작돼 비닐봉투를 대체하고 있다. "재생 원사로 저밀도 원단을 만들어 비닐봉투를 대신하는 천 가방을 제조하죠. 세탁해 다시 쓸 수 있고 나중에 소각해도 환경오염물질이 덜 나와요. 이를 카카오프렌즈에 공급하고 있어요."
AI 이용한 폐의류 재생 시스템 개발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차 대표는 내년 하반기를 목표로 인공지능(AI)을 이용한 폐의류 재생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AI와 블록체인을 이용해 폐의류 수거와 보상, 재생까지 하나로 연결한 시스템이다. "폐의류를 AI가 분석해 의류 소재를 자동 분류하는 재생 시스템을 개발 중입니다."
이를 위해 디지털 의류 수거함과 블록체인을 이용한 재생비용 보상 시스템도 개발한다. "옷만 수거할 수 있도록 기술 특허를 출원한 디지털 수거함을 만들고 있어요. 무게와 부피를 측정해 수거함이 다 차면 수거업체에 알려주죠."
보상 시스템은 옷을 판매할 때 가격에 재생 비용을 포함해 받고 수거하면서 이를 돌려주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10만 원짜리 옷을 11만 원에 팔고 나중에 수거할 때 1만 원을 돌려주는 식이죠. 여기에 이력 추적 관리가 가능한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합니다. 특정 의류업체보다 우리처럼 제3의 업체가 나서서 재생 시스템을 만들면 여러 업체가 참여할 수 있죠."
이를 통해 그는 국내 의류 쓰레기를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가장 큰 문제는 의류업체들이 지나치게 과잉생산해서 너무 많이 버리는 것입니다. 지난해 국내 의류 시장 규모가 45조 원인데 그중 재생 시장은 1조 원에 그칩니다. 나머지 폐의류는 모두 수거해 아프리카 중남미 등으로 보내요. 그래서 국내 폐의류 시장이 세계 5위에요. 그만큼 의류 쓰레기가 많이 나온다는 뜻이죠."
재생 사업 전국 확대 추진
매출은 지난해 13억 원, 올해 15억 원을 목표로 한다. "매출 비중이 세탁 사업 70%, 재생 사업 30%인데 점점 재생 사업 비중이 오르고 있어요. 내년 매출 목표는 40억 원입니다. 아직은 적자이지만 내년에 손익분기점에 도달할 것으로 봐요."
투자는 지금까지 서울대기술지주 등에서 6억5,000만 원을 받았다. "추가 투자를 여러 업체들과 논의 중입니다."
새로 투자받으면 파쇄와 해체를 한군데서 하는 공장을 만들고 재생 사업을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포스코홀딩스가 조성한 강원 강릉시 옥계산업단지에 공장을 짓는 방안을 논의 중이에요."
해외 진출도 타진한다. "해외 의류업체에서 원하면 재생 원단을 제공할 수 있어요. 문제는 우리의 인지도입니다. 해외 의류업체들은 잘 모르는 원단업체들과 쉽게 거래하지 않아요. 그래서 대기업 역할이 중요해요. 해외에 알려진 대기업을 통해 원단을 공급하면 유리하죠."
경영진이 월급 더 받으려면 신입사원 월급 올리도록 연동
차 대표는 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삼성물산과 SK커뮤니케이션즈를 거쳤다. "삼성과 SK에서 인터넷쇼핑 사업 디자인과 기획 등을 했고 나중에 SK플래닛으로 옮겼어요."
사업을 시작하며 차 대표는 두 가지 원칙을 지키고 있다. 우선 국내 폐기물을 재활용하는 고집이다. "중국은 인민해방군복을 파쇄해 재생 원사를 만들어 싸게 팔아요. 이를 사용하면 비용이 덜 들지만 국내 폐기물 재활용을 위해 일부러 국내 생산을 고집해요."
또 다른 철칙은 경영진 연봉을 신입사원보다 3배 이상 받지 못하도록 만든 연봉 상한 규정이다. 전체 직원 19명과 과실을 골고루 나누기 위해서다. "회사 정관에 경영진 연봉 상한 규정을 못 박았어요. 사장 월급을 올리려면 신입사원 연봉을 먼저 올려야 해요."
앞으로 그가 바라는 것은 경쟁업체의 출현이다. "국내에서 재생 사업을 하는 스타트업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경쟁자가 있어야 시장이 커져요. 그것이 곧 모두에게 좋은 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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