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 처음 시도한 실패주간
"계속해도 될까, 실패하면 어쩌나"
경험담 공유하며 서로 공감·위로
"실패 부끄러워 않는 문화 확산을"
"파이널 프로젝트 리포트에 네 줄을 써냈어요. 그중 한 줄은 '나머지 부분은 완료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사과문이고요. 제가 왜 그랬을까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A씨는 1일 대전 유성구 KAIST 본원 창의학습관 로비에서 학부생 시절의 실패작 보고서를 청중 앞에 공개했다. 성실한 사람이라 자부했던 종민씨는 그 시절 코로나19로 자취방에 홀로 있는 시간이 많아지며 사회와 단절돼갔다. 눈앞에 과제가 닥쳐도 현실을 외면하는 방법을 택했고, 결국 여백이 더 많은 보고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를 벗어나기까지 2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고 A씨는 담담히 말했다.
망한 기억 꺼내놓은 KAIST 수재들
이날 마이크를 잡은 학생은 A씨만이 아니었다. 자동차 '티코'를 고쳐 시베리아 횡단을 계획했던 박정수씨는 "티코를 몰다가 6중 추돌 사고가 나서 시베리아도 못 갔고 다친 몸으로 공부도 어려웠지만,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면서 "연구는 실패를 많이 할 수밖에 없는데 '이 정도면 괜찮지' 하는 생각으로 극복하며 성장 중"이라고 자신의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는 1, 2년 안에 '프린스' 차량을 타고 시베리아 횡단을 다시 시도할 계획이다. 이 외에도 열심히 과제를 했지만 잘못 제출해 '빵점'을 받은 아찔한 경험, 대입과 편입 실패를 딛고 대학원 진학에 간신히 성공했는데 암 진단을 받은 안타까운 이야기 등이 로비를 메웠다.
난데없이 실패담을 털어놓은 이들은 KAIST 실패연구소가 주최한 '망한 과제 자랑대회' 참가자들이다. 과학을 선도하기 위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문화를 일구겠다는 목적으로 2021년 문을 연 실패연구소는 지난달 23일부터 2주간을 '실패주간'으로 정하고 △'일상에서 포착한 실패의 순간들' 사진전 △망한 과제 자랑대회 △실패 세미나 등을 열고 있다.
앞서 열린 사진전도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퇴근길에 찍은 달 사진을 출품한 석사과정생 오은지씨는 "실험 준비를 위해 일주일 내내 새벽에 퇴근한 적이 있는데, 달이 어느새 그믐달이 된 것을 보면서 '이렇게 잘 안되고 있는데 계속해도 될까, 실패하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고 회상했다. 도서관 열람실을 찍어 출품한 3학년 김승범씨는 "기말고사를 준비하다 밤 9시쯤 도서관에서 나왔는데, 계속 집중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서 내가 KAIST 학생으로 자격이 있나 싶어 불안했다"고도 했다.
성공의 단면보다 더 와닿는 실패담
실패담 공유는 용기와 위로에 가닿았다. 구성원들이 실패를 극복하는 과정을 보며 실패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행사를 지켜본 1학년 정민호씨는 "성공의 단면만 보여주는 경우는 많다. 실패를 보여준 이번 행사 덕분에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유연함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도전적이고 다양한 시도를 해 볼 용기도 생겼다"는 소감을 밝혔다. 중학생 딸과 함께 경기 부천시에서 왔다는 관람객 김윤수씨는 "앞으로 입시를 치를 딸이 힘들 때마다 선배들의 실패담을 떠올리며 위로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실패연구소는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문화를 퍼뜨리기 위한 활동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안혜정 연구조교수는 "우수한 학생들은 조금만 실패해도 압박감, 불안감을 많이 느끼는 것 같다"며 "학교가 이런 점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진단했다. 조성호 실패연구소장(전산학과 교수)은 "남들과 실패를 공유하면서 실패를 받아들이는 폭도 넓어지고 충격도 줄일 수 있다"며 "이런 문화가 KAIST를 넘어 다른 대학까지 퍼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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