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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 풀어주고 몸통 잡자"... 플리바게닝 도입 군불 때는 검찰

입력
2023.11.06 10:30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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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바게닝 도입시 효과·부작용은]
'수사 협조시 감형' 조항 명문화할 것인가
법원·학계 등 "사법정의 반해" 반발 무산
美 재판 전 종결 90%…日도 '협의·합의제'


편집자주

사법방해죄와 함께 법무부와 검찰의 또다른 숙원사업이 있는데요. 바로 '플리바게닝'이라고 불리는 유죄협상제와 사법협조자 형벌감면제입니다. 혐의를 인정하고 수사에 협조한 피의자의 형을 감경해 주는 플리바게닝은 할리우드 영화에선 많이 묘사되지만, 한국에선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거래입니다. 검찰은 왜 한국에 없는 이 제도를 도입하고 싶어 하는 걸까요? 플리바게닝이 허용되면 일어날 효과와 부작용을 한국일보가 자세히 살펴봅니다.

영화 ‘내부자들’의 한 장면. 검사 우장훈(조승우 분)이 비자금 사건 주요 피의자에 플리바게닝을 시도하는 장면. 쇼박스 제공

영화 ‘내부자들’의 한 장면. 검사 우장훈(조승우 분)이 비자금 사건 주요 피의자에 플리바게닝을 시도하는 장면. 쇼박스 제공


그럼 한 10년 정도는 빵에서 썩어도 된다? 자, 석명관씨, 나한테 협조하면 형량 딱 반으로 쪼개드릴게.

(영화 '내부자들'의 우장훈 검사)

영화 '내부자들'(2015년)에서 우장훈 검사(조승우 분)는 미래자동차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해외로 도피했다가 귀국한 석명관 전 한결은행장에게 은밀한 거래를 제안한다. 수사에 협조하면 석 전 은행장에게 비교적 경미한 혐의를 적용해 형량이 적게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것.

유죄협상제(플리바게닝)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그러나 국내법상으론 법적 근거가 없다. 원칙적으로 수사기관 종사자는 알고 있는 범죄 혐의를 봐주거나 눈감아 줄 수 없고, 피의자의 혐의를 거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전체 범죄 90% 이상에서 플리바게닝이 적용되는 미국과 완전히 다른 수사환경이다.

(죄를 인정하면) 6개월이면 집으로 돌아갈 거야. 그러나 자네가 무죄를 고집한다면 종신형을 받게 될 거야.

(영화 '어퓨굿맨'의 주인공이 해병대원들에게 플리바게닝을 설득하는 장면)

할리우드 영화 '어퓨굿맨'(1992년)의 법정 장면. 주인공 대니얼 캐피는 진실을 추구하기보단 플리바게닝을 통해 사건을 신속하게 해결하려하는 해군법무관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할리우드 영화 '어퓨굿맨'(1992년)의 법정 장면. 주인공 대니얼 캐피는 진실을 추구하기보단 플리바게닝을 통해 사건을 신속하게 해결하려하는 해군법무관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플리바게닝 연구 한창인 검찰

요즘 검찰에선, 국내엔 없는 제도인 이 플리바게닝의 도입 필요성과 가능성을 염두에 둔 연구가 한창이다. 올해 3월 대검찰청은 코로나 팬데믹 탓에 중단됐던 형사법 아카데미를 4년 만에 재개했다. 그 첫 주제가 바로 '사법협조자 형벌제재 감면제도'였다. 윤성호 춘천지검 검사 등 5명은 미국 검찰의 플리바게닝 제도 등을 연구해 보고서를 제출했고, 9월 대검이 개최한 국제형사법컨퍼런스에서 플리바게닝과 사법협조자 형벌감면제도가 중점적으로 다뤄졌다.


왜 플리바게닝이 검찰의 중점 과제가 된 것일까. 검찰은 △범죄 수법이 날로 발전하고 은밀하게 이뤄지는 데다 △검찰 단계 피의자 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이 제한된 이후, 수사 현장에서 범죄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며 고충을 호소한다.

대검은 "신속하고 효과적인 실체 진실 발견을 위한 플리바게닝 도입 추진 등 형사사법제도 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이다. 이원석 검찰총장도 이미 지난해 "미국 형사절차의 95%를 차지하는 플리바게닝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통해, 검찰 제도 발전 방향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적이 있다.

이원석 검찰총장이 지난달 4일 서울 서초구 한 호텔에서 열린 '2023 서울 국제형사법 컨퍼런스'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대검찰청 제공

이원석 검찰총장이 지난달 4일 서울 서초구 한 호텔에서 열린 '2023 서울 국제형사법 컨퍼런스'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대검찰청 제공


'깃털' 봐주고 '몸통' 잡자

흔히 ①유죄협상제와 ②사법협조자 형벌감면제를 플리바게닝으로 통칭하는 경향이 있지만 엄밀히는 차이가 있다. 유죄협상제는 '자기자신'의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면 형사처벌 감경, 신속처리 등 일정한 조건으로 협상할 수 있는 제도다. 사법협조자 형벌감면제는 다수가 가담한 구조적·조직적 범죄에서 본인과 관련된 '타인'의 범행을 진술하는 등 진실 규명에 기여하면 처벌을 감면받는 제도다.

검찰이 국내에 들여오려는 것은 유죄협상제보다는 사법협조자 형벌감면제였다. 유죄협상제는 형사소송절차를 신속·간이화하려는 효율적 목적이 크나, 사법협조자 형벌감면제는 내부자의 협조를 통해 부패·조직범죄에서 증거를 확보하려는 이유에서 시작된다. '몸통'을 잡는 일에 도움을 주는 '깃털'의 처벌을 덜어주는 것이라, 유죄협상제에 비해 '범죄자와 거래를 하느냐'는 여론의 비판이 덜하다는 차이도 있다.

현행법엔 △형법상 자수감면 △특정범죄신고자 등 보호법 △공익신고자보호법 △부패방지권익위법 등 신고감면 제도가 있고, 대검 예규 차원에서 '카르텔 사건 형벌감면 및 수사절차에 관한 지침'을 규정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 아무리 검사가 범죄 규명에 협조한 걸 감안해 구형을 낮추고, 행정기관이 의견서를 내준다고 해도, 결국 법관 재량에 따라 형량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사법협조자 형벌감면제를 규정한 법적 근거가 없으면, 부패·조직범죄 특성상 진실을 말했을 때 보복 위험이 있는 내부자 입장에선 검사의 말만 듣고 수사에 협조할 결심을 하긴 어렵다. 할리우드 영화에선 범죄를 고발하는 내부자가 백악관의 서면 면책 약속(immunity)을 받아내기도 하지만, 한국에선 불가능한 일. 한국 법체계상 검사가 약속을 어겨도 그만이거니와, 다른 고소·고발이 접수되면 검사의 약속은 물거품이 될 수 있다.

범죄자와 거래? 국민 법감정 넘어야

이런 플리바게닝을 제도화하기 위해 대검은 2005년 초부터 연구를 시작했고, 법무부는 2010년 선진 형사사법제도 도입 일환으로 '내부증언자 불기소처분제 및 형벌감면제'란 명칭으로 사법협조자 형벌감면제 신설을 추진했다.

당시 형사소송법 개정안엔 '여럿이 특정 범죄를 범한 경우 정범·공범 관계 피의자 진술이 범죄 규명에서 필수적일 때, 검사는 재판 증언을 조건으로 불기소 처분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검사와 피의자가 서면에 서명하는 방식으로, 검찰시민위원회 의결을 통해 외부통제를 받겠다는 방침이었다. 적용대상은 조직폭력·마약·부패범죄로 한정했다.

아울러 형법 개정안엔 '피고인이 수사·재판절차에서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진술해 범죄 규명, 결과 발생 방지, 범인 체포에 기여한 경우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미국식 플리바게닝과 다르다"며 반감을 줄여보려 했고, "내부자 증언 확보를 통해 거악을 척결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법조계와 학계의 반대 목소리를 넘어서기 어려웠다. 검사가 범죄자와 거래해 형을 깎아주는 것 자체가 국민 법감정에 반하고, 수사단계에서 형량이 정해지면 '법관에게 재판 받을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범행을 주도한 주범이 제도를 악용해 오히려 종범에 책임을 전가할 수 있다는 점, 자백 강요 등 검찰권 남용 문제도 지적됐다.

다만 최근 급변한 형사사법제도에 따른 사건 적체 등 현안을 무시할 수 없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검찰 간부는 "사법농단 재판은 4년간 진행 중이고, 대장동 수사는 2년이 넘어간다"며 "플리바게닝, 사법협조자 형벌감면제가 있었다면 상황이 달랐을 것"이라고 짚었다. 그는 "사법제도 효율성 차원에서도 논의할 때가 됐다"며 "검찰권 오·남용 우려는 법원이 통제하도록 제도를 설계하면 될 것"이라고 했다.

많은 법원에서, 플리바게닝은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판사와 변호사의 편의를 위해 활용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법원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정한 재판을 제공할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1978년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의 LA 변호사협회 연설)


미국 연쇄살인범 게리 리지웨이의 모습. 48명을 살해한 리지웨이는 수사에 협조하고 실종자 정보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검찰과 플리바게닝을 했고, 그 결과 사형 대신 가석방 없는 종신형 선고를 받았다. 시애틀=로이터

미국 연쇄살인범 게리 리지웨이의 모습. 48명을 살해한 리지웨이는 수사에 협조하고 실종자 정보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검찰과 플리바게닝을 했고, 그 결과 사형 대신 가석방 없는 종신형 선고를 받았다. 시애틀=로이터


한국과 비슷 일본도 '사법거래' 도입

외국은 어떻게 적용하고 있을까. 미국은 플리바게닝 천국이다. 죄질 구분 없이 피고인의 유죄 인정을 조건으로 기소유예 또는 가벼운 죄로 기소하거나, 형량을 덜어주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전체 사건 90~95%가 플리바게닝으로 종결될 정도. 합의 결과가 제출되면 판사가 피고인 답변이 자발적이었는지, 유죄가 인정되는지 등을 심사해 승인 여부를 결정한다. 승인이 나지 않으면 통상의 재판 절차로 진행한다.

프랑스도 재판에 넘어가는 사건이 10% 수준이다. 피해자 배상 등을 조건으로 형벌을 부과하지 않는 형사조정, 피의자가 유죄를 인정해 판사 추인을 받으면 협상할 수 있는 유죄협상(CRPC) 제도가 있다. 사건 적체에 대한 국민적 불만으로 1990년대부터 관련 제도가 태동했고, 미국식 플리바게닝과 달리 중죄는 제외한다는 특징이 있다. 사법협조자 형벌감면제는 테러범죄 위주로 적용하다 범위를 넓혔다.

일본은 형사소송법을 개정해 '수사·공판협력형 협의·합의제도'를 2018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특정 범죄 사건 피의자나 피고인이 '타인'의 형사사건 관련 진술로 수사·공판에 협력하면 불기소나 처벌조항 변경 등 유리한 처분을 합의하는 제도다. 적용 범위는 재정경제·마약총기범죄로 한정되며, 검사와 피의자·피고인 합의에 더해 변호인 동의도 있어야 한다.

같은 시기 일본에 도입된 '형사면책제도'도 있다. 증인이 기소되거나 유죄판결을 받을 우려가 있는 부분에 대해 증인신문이 예정돼있거나 증언을 거부하는 경우, 검사의 청구와 재판소 결정으로 증인의 증언거부권을 박탈하는 제도다. 대신 이를 통해 얻은 진술이나 증거는 해당 증인 본인의 형사사건에서 그에게 불리한 증거로 사용할 수 없게 했다.

검찰은 특히 한국과 유사한 형사소송법 체계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 제도를 눈여겨 보고 있다. 이 제도들은 수사기관의 피의자 허위 자백 강요, 특수부 검사 증거 조작 사건 등이 잇따라 벌어지면서 신뢰가 추락하자, 과도하게 조사와 조서에 의존하는 비율을 낮추되 조직범죄에서 공범들의 공모내용에 대한 물적증거 수집이 어려워지는 것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됐다.

이유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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