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이름 없는 자가 없는 사회로
“네 이름이 뭐니?”
“내 이름은 킴이야. 킴이라고 불러줘.”
“그게 네 이름이야?”
“실은 킴은 내 성이야. 내 이름은 ‘현경’이라고 해. 다들 발음하기 어려워하니까 그냥 킴이라고 불러도 돼.”
“친구들끼리는 이름을 불러야지. 현경(실은 횬과 현의 중간 정도로 들렸다), 내 발음 어때?”
“거의 완벽한데! 고마워. 네 이름은 뭐야?”
“내 이름은 사니에야. 사니에라고 불러줘.”
7년 전, 베를린의 한 카페에서 서로의 이름을 묻고 답한 이후 사니에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달콤쌉쌀한(bittersweet)'이란 이름의 카페 주인이었다. 당시 베를린의 한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게 된 나는 매일 ‘여긴 어디? 나는 누구?’를 되물으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동네 친구가 생긴 것이다. 일터에서도 이름을 묻는 이들은 많았지만 발음하기 어려워들 해서 제대로 이름이 불린 적은 거의 없었다. 내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김춘수의 시 '꽃'의 한 구절) 이로 존재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비로소 깨달았다.
이름을 불러 준 그녀
기억도 나지 않는 서너 살 무렵에 독일로 이민 온 사니에의 부모님은 튀르키예 내 쿠르드족 출신이었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사니에가 아니었다. 부모님이 쿠르드어로 지은 이름을 부르기 어렵다고 튀르키예인인 동사무소 직원이 마음대로 바꿔 등록했다고 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분개하는 내게 사니에는 웃으면서, 그러니까 독일 사람들이 내 이름을 잘못 발음한다고 해서 미리 포기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쿠르드족이 기원전에는 지금의 이란 근처에 왕국을 건설하고 문명을 향유한 이들이었다는 것, 튀르키예가 쿠르드어 사용을 금지하고 이들의 독립 시도를 탄압해 왔다는 것,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조직 IS와 어느 민족이나 국가보다 앞장서서 싸워온 이들이 쿠르드인들이라는 것을 알려준 것도 사니에였다.
이런 그녀가 어느 날 눈을 반짝거리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한 번에 다 봤다고 했다. 한국도 쿠르드족처럼 한때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고 이름까지 다 바꿔야 했던 역사가 있었던 줄은 미처 몰랐노라고 했다. 나는 창씨개명은 그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1890년대가 아니라 1940년대에 강요되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일터에서 돌아오는 길에 매일같이 들렀던 사니에의 카페는 우리들의 이런 대화에 주위 손님들이 끼어들며 각국의 근현대사에 대한 나름의 식견과 경험을 나누는 토론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사니에는 자신이 쿠르드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독립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튀르키예,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쿠르드족이 민족 정체성 수호를 명분으로 여성 차별적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고 자주 목소리를 높였다. 1970년대에 독일로 이민 온 사니에의 부모님은 딸이 ‘독일 여성’처럼 될까 두려워하며 대학을 다닐 때까지 통금을 명했다고 했다. 마침 1970년대 독일에서는 페미니즘과 성혁명이 시대적 대세였다. 언제 어딜 가든 자유로웠던 오빠에 대해서는 ‘독일 남성’처럼 되지나 않을까 걱정하지 않았다. “그게 내 케이크가 베를린에서 최고로 맛있는 케이크가 된 이유지. 집에서 하염없이 케이크를 구워댔으니.” 불평등한 현실에 목소리를 높이다가 시니컬한 유머 한 조각을 덧붙이는 건 사니에의 특기였다.
이름의 신분과 젠더 정치학
돌이켜보면 사니에가 내 이름을 물은 그 순간은, 하고 많은 외국인 중 한 명이었던 내가 베를린에 속하는 한 자리를 갖게 된 순간이었다. (나와는 동명이인인) 인류학자 김현경은 한 사회에서 인간이 사람일 수 있는 가능성을 고찰한 책 '사람, 장소, 환대'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적 사실의 문제이지, 사회적 인정의 문제가 아니다. 어떤 개체가 인간이라면, 그 개체는 우리 관계 바깥에서도 인간일 것이다... 반면에 어떤 개체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하며, 그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러니까 인간이지만 사람이 아닌 이들이 있다. 전근대 조선 사회에서는 이런 이들이 많았다. 여자, 상민, 노비들에게는 제대로 된 이름이 없었다. 양반 여자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이름은 아버지 집안의 성씨였다. 반면 왕족 남자와 양반 남자들은 여러 개의 이름을 가졌다. 어릴 때 부르는 이름, 족보에 올라가는 이름, 스승과 동료들이 부르는 이름, 임금이 내려준 이름... 이는 그 시대 특정 신분의 남자들 간 관계가 곧 사회였다는 걸 말해준다.
근대는 이름 없는 자들이 이름을 갖기 시작한 시대다. 즉, 사회 안에서 그들의 자리를 만들기 시작한 시대다. 일제강점기의 신여성 나혜석은 ‘아기’라고 불리다 여학교에 들어가서야 이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자신만의 이름을 갖지 못했다. 1990년대 초 장안의 화제작이었던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는 귀남(貴男)이라는 이름의 아들과 후남(後男)이라는 이름의 딸이 등장한다. 아들은 귀한 남자, 딸은 이후에 꼭 아들을 낳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지은 이름이었다. 남아선호가 팽배했던 그 시절, 드라마는 가부장적 가족의 차별에 짓눌린 딸과 그 가족의 기대에 짓눌린 아들의 다른 인생 경로를 그려내 인기를 끌었다. 이처럼 1970, 80년대에는 ‘남(男)’자로 끝나거나 ‘말(末)’자가 들어가는 여자의 이름이 꽤 있었다. 이런 이름에는 딸은 그만 낳고 다음에는 아들을 낳겠다는 소원과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가 아닌 여성도 남자 사람의 탄생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부성우선주의 폐기를 허하라
이제는 이런 이야기가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일화처럼 여겨질 정도로 변했다. 요즘 아이들의 이름은 언뜻 들어서는 남자 아이인지 여자 아이인지를 알기 어려울 정도로 중성적인 이름이 대세다. 성별보다 개인성이 이름에 묻어나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 때문일 것이다. 한국 사회가 여기까지는 왔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름의 중요한 부분인 성은 여전히 아버지의 성이 디폴트값이다. 2005년 호주제가 폐지되면서 가부장적 가족을 떠받치는 결정적 법제도는 사라졌지만 한 사람의 가족적 기원은 부계를 중심으로 고정되어 있다. 어머니 성을 쓰려면 부부가 혼인신고를 할 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성을 어머니 성으로 하겠다고 미리 등록해야 한다. 지난 정부에서 여성가족부는 법무부와 협의하여 이런 부성우선주의를 폐기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번 정부에서는 여성가족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지면서 사회적 논의는 잠시 멈춤 상태다.
부성우선주의의 폐기는 아버지의 성과 어머니의 성 중 어느 하나를 자신의 이름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나는 1990년대 호주제 폐지운동이 한창일 때부터 부모성을 함께 쓴 이름을 가급적 내 이름으로 표기해 왔다. 그때부터 어머니의 성도 어머니의 아버지 성이니 그게 그거 아니냐는 반문에 맞닥뜨렸다. 그럴 때마다 그런 의견이 역설적으로 상기시키는, 어마어마한 스케일로 삭제되어 온 모계의 역사를 상상해 보자고 말하곤 한다.
이처럼 부성우선주의 폐기는 한국 사회가 어떠한 방식으로 개개인의 자리를 주어야 한다고 보는지와 관련된 우리들의 정의 감각을 질문한다. 그 사회는 이름이 삭제되거나 없는 자들이 없는, 인간이지만 사람은 아닌 자들이 없는, 그런 곳이 될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사회일 것이다. 7년 전 어느 날, 사니에가 내 이름을 묻고 불러 자리 한편을 내주었던, 그래서 우리가 친구가 되고 더 많은 친구들의 자리를 만들 수 있었던, 지금은 사라진 '달콤쌉쌀한' 그곳처럼 말이다.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인 이한 작가와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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