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석유 황제 엔리코 마테이 사망 미스터리
미·영 주도 '세븐 시스터스' 입지 위협
소련 원유 수입 앞두고 전용기 추락
CIA 개입 의혹... "마피아 테러" 증언도
마테이 사망 추적하던 기자도 실종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좇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1962년 10월 27일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오후 7시 무렵. 조종사까지 세 명을 태운 개인 전용기가 이탈리아 카타니아를 출발해 밀라노를 향해 날고 있었다. 목적지까지 불과 16㎞를 남기고 엔리코 마테이(1906~1962)의 전용기가 추락했다. 생존자는 없었다. 이탈리아 국영 에너지 기업을 이끌며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로 군림하던 56세 사업가 마테이는 그렇게 짧은 생을 마감했다.
당시 이탈리아 정부가 발표한 공식 사망 원인은 "짙은 안개와 폭풍우 등 기상 악화에 따른 비행기 추락"이었다. 하지만 총리를 뛰어넘는 영향력을 지녔던 사업가이자 이탈리아의 경제 기적을 일궈낸 입지전적인 인물이 사고로 허망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마테이의 권력과 야망이 명을 재촉했을 것이란 풍문이 떠돌았지만 확인되지 않았다. 61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의 죽음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다.
석유 질서 주도 '세븐 시스터스'에 도전장
마테이는 1953년 이탈리아 국영 에너지 기업 에니(Eni)의 초대 회장에 올랐다. 당시는 미국과 영국이 국제 석유 질서를 주도하던 때였다. 두 나라는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중동 산유국들 유전을 선점해 사업권을 나눠 가졌다.
이 과정에서 막강한 자본력을 앞세운 석유 기업 7곳이 성장했다. 미국계인 △스탠더드 오일 뉴저지 △스탠더드 오일 뉴욕 △스탠더드 오일 캘리포니아 △텍사코 △걸프 오일과 영국계 △셸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이 그 주인공이다. 세계 석유 생산과 유통을 장악한 이들 기업은 이후 인수 합병을 거쳐 오늘날의 엑손모빌, 셰브론 등이 된다.
마테이는 이들의 담합을 두고 볼 수 없었다. 7개 기업을 '세븐 시스터스(Seven Sisters·일곱 자매)'라 부르면서 중동 석유 이권을 독점한 패거리 행태를 비난했다. 그는 지중해의 반도 국가 이탈리아가 유럽 내 원유 유통의 이점을 갖고 있다고 확신했다. 에니를 이끈 지 4년 만인 1957년 이란의 석유 개발권 중 일부를 따내며 중동 사업에 물꼬를 텄다.
당시 세븐 시스터스는 중동과 석유 수익을 50대 50으로 나눠 가졌다. 마테이는 75(중동)대 25(에니)로 나누는 파격적인 계약 조건을 앞세워 세븐 시스터스의 입지를 압박해갔다. 1962년 3월 옛 소련과 지중해 파이프라인을 연결해 소련의 원유를 수입하는 초대형 협정까지 성사시켰다. 미국과 영국의 석유 기업들이 쥐락펴락하던 글로벌 석유 질서를 결정적으로 위협한 순간이다.
가장 강력한 사업가, 미국 마피아에 당했나
전 세계가 마테이의 거침없는 행보를 주목했다. 특히 미국 언론들은 저돌적인 사업가 마테이를 경계했다. 시사주간 타임지는 "마테이는 이탈리아를 넘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 됐다"고 했고, 뉴욕타임스는 "이탈리아에서 마테이의 영향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정치부터 외교 정책까지 영향력이 광범위하다. 이탈리아 보수 정치인과 신문마저 그가 통제되지 않는다며 공격하고 있다"고 했다.
마테이는 위축되지 않았다. "나의 조국 이탈리아를 석유 카르텔의 손아귀에서 해방시켰다"고 자찬했다. 거대 세력에 맞선 거물 사업가는 그렇게 탄탄대로를 걷는가 싶었지만, 조국의 상공에서 56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가 사망한 건 소련과의 파이프라인 연결 공사를 앞둔 때였다.
5개월 뒤 이탈리아 국방부는 마테이의 전용기가 밀라노 리나테 공항과 16㎞ 떨어진 파비아 바스카페 마을 인근에 추락했다는 1차 조사 결과를 내놨다. 악천후로 인한 전형적인 비행기 추락 사고였다는 결론이었다. 조종사 이네리오 베르투지, 취재차 마테이와 동행했던 미국 언론인 윌리엄 맥헤일도 사망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마테이의 죽음을 사고사로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는 적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의 공격적 행보를 가장 경계한 대상에 의심의 눈길이 쏠렸다. 세븐 시스터스 중 무려 5개 기업을 보유하고 있던 미국이었다. 이란에 이어 소련과도 손잡았던 그는 미국에 눈엣가시 자체였다.
마테이의 행보를 두고 당시 외신들은 "미국을 격분시키기에 충분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1958년 그를 "국가 안보의 걸림돌"로 묘사한 기밀 보고서가 공개되기도 했다. 그의 죽음에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이탈리아 마피아가 개입했을 것이란 루머도 나돌았다. 하지만 결정적 증거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테이 죽음 쫓던 '불편한 언론인'의 실종
마테이가 사망한 지 8년이 흐른 1970년 9월 16일. 또 하나의 소식으로 이탈리아가 들썩였다. 팔레르모 지역 석간신문 로라(L'Ora)에서 탐사보도 기자로 일하던 마우로 데 마우로(당시 49세)의 실종이었다. 데 마우로는 딸 프랑카의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퇴근길에 집 근처에서 행방을 감췄다. 프랑카는 아버지가 집 앞에서 기다리던 세 명의 남자와 차를 타고 떠난 뒤 소식이 끊겼다고 증언했다. 데 마우로 기자의 마지막이었다.
데 마우로의 실종은 8년 전 마테이의 죽음을 소환했다. 실종 직전 데 마우로는 이탈리아 영화감독 프란체스코 로시(2015년 사망)의 요청으로 마테이의 죽음에 대한 취재에 한창이었다. 데 마우로는 마테이의 죽음과 마피아의 연관성을 집요하게 파헤쳤다.
경찰은 데 마우로가 시칠리아 마피아 조직인 '코사 노스트라'에 납치돼 살해됐을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마피아 조직에 데 마우로는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한 불편한 언론인'이었기에 살해 동기가 있었다는 시나리오였다. 마테이 죽음의 배후 역시 코사 노스트라라는 소문까지 퍼졌다. 전용기에 설치한 폭발물 테러에 마테이가 희생된 것이란 설이었다.
마테이는 거듭 소환됐다. 시칠리아 마피아 단원 출신으로 훗날 마피아의 실체를 폭로한 토마소 부셰티는 "미국 마피아가 코사 노스트라에 마테이 제거를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한 이탈리아 검찰은 1995년 마테이의 사망 사건을 재조사하기로 결정했다. 마테이 사망 33년 만이었다. 유해 부검에선 단순 항공기 추락사가 아니라 기내 폭발물로 인한 사망일 가능성이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사법당국은 마테이의 사고를 '테러 사건'으로 재분류했다.
"코와 입 기형"... 51년 만에 발견된 유해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암살의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강대국들의 눈엣가시였던 이탈리아 석유 황제 마테이의 유해는 사망 당일의 진실과 함께 다시 한번 땅속 깊이 묻혔다. 데 마우로 기자는 시신조차 발견되지 않았다. 그로 추정되는 유해가 발견된 건 그가 사망한 지 51년이 지난 뒤인 2021년 11월이었다.
시칠리아 경찰은 시칠리아섬 에트나산 중턱의 외딴 동굴에서 남성의 유해를 발견했다. 키 170㎝, 사망 추정 시기 1970~1990년대 초반, 사망 당시 나이 최소 50세. 경찰은 "코와 입 모양이 기형적"이라고 말했다. 결정적 증거였다. 프랑카는 아버지임을 확신했다. 데 마우로는 2차 세계대전 때 입은 부상으로 코와 입 모양이 기형이었다.
동굴은 사람의 접근이 쉽지 않은 곳에 있어서 데 마우로가 스스로 찾아 들어갔을 가능성은 없다고 경찰은 전했다. 유해 주변에는 옷, 신발, 손목시계, 지폐 등이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원한에 의해 살해됐다는 정황이지만, 유해의 정확한 신원과 사망 경위는 밝혀지지 않았다. 유해는 끝까지 말이 없었다.
데 마우로 기자에게 마테이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 찾기를 의뢰했던 프란체스코 로시 감독은 1972년 영화 '마테이 사건'을 제작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마테이를 죽인 배후를 지목하지 않은 채 열린 결말로 마무리된다. 로시 감독은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에겐 내가 살고 있는 사회를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영화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적 순간을 기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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