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대비 정책 보이지 않아
총선용 포퓰리즘 정책도 기승
비전 부재가 중도층 실망감 키워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두어 달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은 회고록 연재와 관련한 인터뷰에서 재임 시 치적으로 공무원연금 개혁, 사드 배치, 창조경제 혁신센터 등을 들었다. 탄핵으로 임기를 마치지 못했지만 정책적으로 실패한 정부는 아니라는 반박이었다. 좀 더 지나서 역사적 평가를 받아야 할 부분도 있긴 하지만, 공무원연금 개혁만큼은 눈앞의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않고 대통령 소임을 다한 업적이라는 데 동의한다. 400만 공무원 가족의 표심까지 잃을 각오를 하며 추진한 제도 정비였다.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감이 없었으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기초연금이나 무상보육 도입 등도 확고한 기조를 갖고 밀어붙였다면 그의 레거시로 남을 만했지만 정책적 철학 부재 탓인지 그 스스로도 이를 거론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탄핵으로 정치적으로 사망 선고를 받았지만 박근혜 정부가 후대에 남긴 레거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퇴임 후 자신의 치적으로 무엇을 내세울까. 출범 초기 3대 국정과제로 내세웠던 연금개혁, 노동개혁, 교육개혁은 무엇 하나 뾰족한 성과라고 내세울 게 없다. 이런저런 민생 현안을 챙기고 있지만 일관된 정책 기조와 철학이 무엇인지도 모호하다. 한동안 자유민주주의를 금과옥조처럼 호명했지만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철저했던 것도 아니다. 이는 정책적 노선이라기보다 야당 때리기용 레토릭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어떤 이들은 한일관계 정상화와 한미일 협력 강화에 후한 점수를 주겠지만, 안보 핵심 과제인 북핵 해결에서 획기적 전기를 마련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윤 정부의 트레이드마크로 눈에 띄는 것은 카르텔 척결이다. 화물연대, 건설노조, LH, 입시학원 등을 ‘이권 카르텔’로 몰며 결기를 보였는데, 기득권 세력의 담합과 지대추구행위를 근절해 공정하고 투명한 시장 질서를 회복하는 데까지 나아간다면 치적으로 삼을 만하다. 하지만 카르텔의 최고 포식자는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법조 카르텔’이 아닐까. 이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변죽만 울리는 군기 잡기용 엄포라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지금까지 윤 대통령의 레거시라고 꼽을 만한 게 없는 것은 비전 부재에서 비롯된 것 같다. 윤 정부에선 10년, 20년 뒤의 변화를 대비하는 구조개혁이나 기반 조성 정책을 찾아보기 어렵다. 지방소멸, 연금고갈, 노동력 부족 등 인구 절벽과 기후 위기 시대의 여러 문제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지만 이를 준비하는 움직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미래 먹거리 연구에 전력을 쏟아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연구 개발 예산을 삭감하거나, 지방소멸 대안으로 나온 지역 메가시티 담론을 ‘서울 메가시티’로 변질한 것은 그야말로 반미래적 퇴행이나 마찬가지다.
윤 정부에는 임기 3년차인 내년이 레거시를 남길 결정적 시간이다. 하지만 총선이 걸려 있다 보니 ‘공매도 금지’ 같은 단기 포퓰리즘 정책이 더욱 기승을 부릴 듯하다. 그럴수록 “나라를 어떻게 이끌겠다는 건지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중도층의 실망감은 더 커질 수 있다.
애당초 5년 단임 대통령에게 장기 비전을 기대하는 게 무리일까. 일본이 2001년에 “50년간 30명의 노벨 과학상 수상”을 목표로 세워 기초 과학에 체계적 지원을 하는 것처럼 국가의 근간을 튼튼하게 하는 초당파적 어젠다를 추진한다면 정치를 복원하고 야당의 협조까지 기대할 수 있다. 당장 성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미래를 위해 책임감을 갖고 추진한다면 언젠가는 국민들이 인정할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이 레거시다. 윤 대통령이 고민해야 할 것은 내년 총선이 아니라 10~20년 뒤의 한국이다. 멀리 내다보고 달릴 때라야 현명한 중도층의 표심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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