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의 역습]
3분기 만에 다시 역성장
파산 늘고, 구매력 약화
경기 부진 계속될 전망
계속된 돈 풀기 후폭풍이 일본 경제도 집어삼키고 있다. 엔화 가치가 33년 만에 최저 수준까지 떨어지자 도요타 등 일부 기업은 ‘돈벼락’ 기대에 부풀었지만, 정작 일본의 경제 성장률은 하락 전환했다. 중소기업은 연쇄 도산의 늪에 빠졌고, 수입품 가격 상승에 일본 국민은 더욱 가난해지고 있다. ‘나쁜 엔저’를 넘어 ‘슬픈 엔저’라는 자조 섞인 말이 나돌 정도다.
잘나가는 것처럼 보였던 일본 경제는 3분기 0.5% 역성장했다. 시장 전망치(-0.1%)를 크게 밑도는 것으로, 이 같은 추세가 1년간 이어질 것을 가정해 산출한 연간 성장률은 마이너스(–) 2.1%다. 올해 1분기(0.9%)‧2분기(1.1%) ‘반짝 성장’한 일본 경제가 엔저에 따른 소비·투자 위축에 다시 뒷걸음질 친 것이다.
1990년 '거품 경제' 붕괴 후 일본은 물가 하락‧저성장에서 벗어나고자 인위적으로 엔화 가치를 낮게 유지해왔다. 돈을 풀어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 수출기업의 이윤이 늘고, 기업 투자‧민간 소비‧고용이 활력을 되찾을 거라는 ‘좋은 엔저’ 전략이었다. 지난해 주요국이 일제히 기준금리를 급격히 올릴 때도 마이너스(-0.1%)를 고수한 건 이 때문이다.
엔저의 지원 사격에 환차익을 많이 낼 수 있는 수출기업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도요타만 해도 올해 4월부터 내년 3월까지 연결 순이익(3조9,500억 엔)이 전년보다 61%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역대 최대였던 2022년(2조8,501억 엔)을 크게 웃도는 규모다. 그러나 김규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일본동아시아팀 선임연구위원은 “일부 기업의 실적 개선은 엔저가 만든 착시 효과”라며 “성장률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엔저의 과실이 일부에게만 집중되고 있어서다. 당장 상반기에만 4,042곳의 일본 기업(부채액 1,000만 엔 이상 기준)이 파산했다. 1년 전보다 약 32% 증가한 것으로, 상반기 기준 2018년 이후 가장 많은 규모다. 엔저로 물가가 오르면서 올해 1~8월 일본 엥겔지수는 평균 27.3%까지 뛰었다. 코로나19 여파가 있었던 2020년을 제외하면 1980년대 초반과 비슷한 수준이다. 엥겔지수는 가계 소비지출에서 식료품이 차지하는 비율로, 해당 지수가 높을수록 소비여력이 떨어진다.
경기가 부진한 상황에서 섣불리 긴축 정책을 펴기도 어렵지만, 엔화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금리 인상 결단을 내린다고 해도 막대한 재정 출혈을 감내해야 한다.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259%(2021년 기준)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국채 발행 잔액도 1,000조 엔을 넘겼다. 엔화를 회수하려고 기준금리를 높이면 그만큼 막대한 이자를 부담해야 한다는 뜻이다.
진퇴양난 속에서 가계‧기업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3분기 이후에도 경기 부진이 이어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일본 경제는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은 아베노믹스 때와 판박이”라며 “부진한 임금 인상으로 소비가 더욱 얼어붙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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