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1 글로리아 밴더빌트
미국 ‘철도왕’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가문의 어린 상속녀 글로리아 로라 밴더빌트(1924~2019)에 대한 친모(Gloria Morgan Vanderbilt)와 고모(Gertrude Whitney)의 양육권 소송이 1934년 10월 시작됐다. 고모 휘트니가 부당하게 딸을 가로채려 한다며 친모가 제기한 소송. 고모는 친모가 방탕한 생활로 조카 양육을 등한시한다고 주장했다.
친모 모건은 만 19세 때인 1923년 밴더빌트가의 42세 상속인 레지널드와 결혼, 이듬해 글로리아를 낳은 뒤 18개월 만에 알코올중독의 남편과 사별했다. 만 21세 젊은 과부는 13만 달러를, 딸은 가족 펀드에서 250만 달러를 상속받았다. 미망인이 아직 미성년자(당시 기준)여서 펀드 기금 관리는 법원에 위탁됐고, 모건은 매달 일정액의 양육-생활비를 지급받았다.
결혼 전부터 사교계 생활에 열정적이던 친모는 딸을 유모에게 맡긴 채 대서양을 넘나들며 호화롭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이어갔다. 공판에서 유모와 운전기사 등은 친모가 벌인 막장 수준의 연애 행각 등을 폭로하며 당시 불법이던 동성애 의혹까지 제기했다. 어린 딸이 함께 생활하는 공간에 널려 있었다는 누드 사진 등을 문제 삼자 친모 측은 고모가 설립한 뉴욕 ‘휘트니 미술관’의 누드화를 시비 걸기도 했다. 법원은 11월 21일 휘트니의 양육권을 인정했다.
한 매체는 갑부 집안의 불행을 드러낸 저 ‘세기의 재판’이 대공황의 비참에 시달리던 미국인들의 시름을 잠시나마 달랬다고도 소개했다.
하지만 알려진 바 고모 역시 지나치게 엄격하고 냉정한 훈육으로 어린 글로리아에게 이상적인 성장환경을 제공하진 못했다. “불쌍한 어린 부자 소녀(Poor Little Rich Girl)”는 성장 후 고교를 중퇴하고 세 번의 이혼과 네 번의 결혼을 겪는 등 방황했지만 중년 이후 ‘글로리아 진스’라는 브랜드 패션 디자이너 겸 사업가로, 또 작가 겸 화가로서 소설 같은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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