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학술서 10종
어느 한 분야에 치중되지 않고 다양한 주제의 완성도 높은 학술서가 빛난 해였다. 사회과학, 자연과학, 역사, 지역 등 각 분야에서 흥미로운 저작이 눈길을 끌었다.
20년간 빈곤을 연구한 저자의 '빈곤 과정', 노벨 생리의학상의 주역인 mRNA 백신 기술의 기반이 된 RNA 연구를 상세하게 분석한 '꿈의 분자 RNA', 국내 연구자의 첫 흉노 유목제국 통사 '흉노 유목제국사', 저자가 10년간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한 결실인 '미국의 한국 정치 개입사 연구', 해방 후 현대사에서 한국의 난민이 발생하는 과정을 조명한 '난민, 경계의 삶' 등 우직한 연구자의 학술적 성취는 그 자체로 독보적 가치가 있다는 데 중지가 모아졌다.
학문의 토대 위에서 당대에 의미 있는 인사이트를 던진 저작에도 호평이 이어졌다. 노비와 쇠고기라는 낯선 조합으로 조선의 정치사회사를 꿰뚫은 책 '노비와 쇠고기'가 대표적이다. 동아시아 노동연구의 선구자가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 이후 새롭게 등장한 계급의 특징을 분석한 '특권 중산층'과 과학사 전체에서 '과학혁명'이라는 한 가지 주제에 천착한 '휘어진 시대'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엄격한 의미의 학술서는 아니나 간토 학살 100년을 맞은 올해 여러 주체가 공동기획으로 출간한 '1923 간토대학살, 침묵을 깨라'는 책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평이다. 개항부터 촛불집회까지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부산에서 일어난 노동운동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부산노동운동사'는 지역에 기반을 둔 출판사와 저자만이 할 수 있는 역작으로 꼽혔다.
▦노비와 쇠고기
강명관 지음·푸른역사 발행
노비와 쇠고기라는 낯선 조합으로 조선사를 파고든 책. 조선은 소 도축을 금하고 쇠고기를 먹은 사람을 처벌했다. 그러나 17세기 조선은 성균관의 공노비인 반인에게 영업세로 속전을 받고 쇠고기를 도축하는 현방을 허가해 줬다. 책은 성균관의 버팀목이 공노비의 노동과 그들이 팔던 쇠고기였음을 증명해낸다.
▦흉노 유목제국사
정재훈 지음·사계절 발행
몽골 초원의 첫 유목제국 흉노의 역사를 복원한 책. 흉노는 기원전 3세기 고비사막 이남의 몽골 초원을 무대로 등장한 세력이다. 위구르, 돌궐에 이은 고대 유목 제국사 3부작으로써 흉노의 세계사적 위상을 재정립했다. 중앙아시아 연구자인 저자는 ‘사기’의 흉노열전을 새롭게 해석하며 발굴자료와 문헌 기록의 불일치를 극복했다.
▦부산노동 운동사
현정길, 윤영삼 지음·산지니 발행
개항부터 촛불 항쟁까지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부산 지역 노동자들은 일제의 수탈에 대항했고 독재정권과 대기업의 횡포 앞에 단결했다. 조선방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1953년 근로기준법 공포를 이끌며 한국 노동 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다. 책은 수도권 중심의 노동운동 연구에서 주목받지 못한 부산 노동운동의 역사를 집대성했다.
▦꿈의 분자 RNA
김우재 지음·김영사 발행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는 mRNA의 특성을 이용해 코로나19 백신을 개발한 커털린 커리코였다. mRNA백신은 수십 년간 과학자들이 쌓아 올린 RNA 연구 위에서 나온 결과다. 책은 mRNA부터 miR까지 여러 RNA 유형과 발견의 역사를 탐색한다. RNA의 재발견은 분자생물학자들의 DNA 중심 사고방식을 깨뜨렸다.
▦1923 간토대학살, 침묵을 깨라
민병래 지음·원더박스 발행
민병래 작가와 간토학살 100주기 추도사업추진위원회가 간토대학살의 진실을 규명하고 알린 9명의 이야기를 담았다. 간토의 비극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오충공 감독과 극우 세력의 학살부정을 논파한 가토 나오키 작가. 이들은 진상규명, 희생자 추모, 계승과 재현 등 여러 영역에서 간토대학살의 실체와 의미를 전한다.
▦휘어진 시대(총 3권)
남영 지음·궁리 발행
아인슈타인 상대성이론의 ‘휘어짐’은 20세기 현대물리학의 대격변을 일으켰다. 책은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자리 잡은 20세기 과학을 마리 퀴리, 폰 노이만 등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들려준다. 1896년부터 1945년까지를 6개의 시대로 나누어 현대물리학의 전개 과정을 정리했다.
▦특권 중산층
구해근 지음·창비 발행
중산층은 IMF 이후 경제적 양극화 과정에서 상류 부유층과 일반 중산층으로 분열됐다. 책은 경제, 사회, 문화적 특권을 누리는 신흥 상류 중산층을 ‘특권 중산층’으로 명명하며 계층 내부 구성과 성격을 분석한다. 일반 중산층과 차별을 두기 위한 계급 구별 짓기는 계급 세습에 대한 욕망과 계급적 불안에서 비롯됐다.
▦난민, 경계의 삶
김아람 지음·역사비평사 발행
한국에서 난민은 분단 과정에서의 이주와 국가폭력에 의한 피난으로 발생했다. 해방 후부터 1980년대까지의 난민 발생과 정착 문제는 한국 사회의 모순과 과제들의 응축이었다. 책은 정부의 난민 정책을 규명하는데, 특히 농촌정착사업이 난민을 도시에서 배제하고 농지 확대를 위한 노동력으로 동원했다고 지적한다.
▦빈곤 과정
조문영 지음·글항아리 발행
인류학자인 저자는 20여 년간 한국과 중국의 판자촌, 공장지대, 노동자 거주지 등 여러 현장을 다니며 빈곤에 대해 연구했다. 연쇄 자살이 일어난 폭스콘 공장 노동자의 여정을 따라가며 사회가 삭제한 빈자의 목소리와 삶을 복원한다. 빈곤을 분류하고 관리하는 통치와 빈자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는 복지를 비판한다.
▦미국의 한국 정치 개입사 연구(총 3권)
이완범 지음·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발행
미국은 직접적인 개입자 혹은 간접적인 후견자로 한국 정치의 막후에 있었다. 한국 현대정치를 연구한 저자는 박정희 시대 한미관계를 중점적으로 탐구하며, 한국 정치 전환기의 미국 개입설을 깊이 있게 들여다봤다. 미국의 비밀 해제 문서와 한국 자료를 통해 사실관계를 검증하고 한국 정치에 끼친 미국의 영향을 분석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