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쓰레記]
여행용 캐리어 재질별 분리 어려워 모두 소각
유기견 침대 등 개조해 재사용하는 노력도
조립형 캐리어 등 생산단계서 재활용 고려해야
편집자주
우리는 하루에 약 1㎏에 달하는 쓰레기를 버립니다. 분리배출을 잘해야 한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지만, 쓰레기통에 넣는다고 쓰레기가 영원히 사라지는 건 아니죠.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고 버리는 폐기물은 어떤 경로로 처리되고, 또 어떻게 재활용될까요. 쓰레기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오랫동안 써온 여행용 캐리어가 망가졌습니다. 플라스틱 몸체가 찌그러져서 볼품없는 모습이 됐어요. 고쳐서 다시 써볼까 생각해봤지만 워낙 낡아 구석구석 삐걱대지 않는 곳이 없어 이만 보내주기로 했어요. 여행 갈 때 늘 함께하던 단짝친구인데, 이별을 하려니 아쉽네요. 캐리어는 대형폐기물이기 때문에 처리 비용을 지불한 뒤 스티커를 붙여 분리배출장소에 두었습니다. 부디 좋은 물건으로 다시 태어나길 바라면서요.
하지만 이 같은 바람은 헛된 기대였습니다. 알고 보니 여행용 캐리어는 재활용이 어려워 쓰레기 처리장에서 모두 소각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캐리어는 큰 플라스틱 덩어리인데도 왜 재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요?
캐리어 재활용 서비스가 무려 15만 원?
캐리어를 재활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플라스틱 외에도 여러 재질이 혼합돼 있기 때문입니다. 캐리어의 상단에 보이는 손잡이 부분은 철과 플라스틱이 함께 붙어있는 형태죠. 철제 봉은 보통 캐리어의 몸통까지 이어져 있어 분리가 쉽지 않습니다. 플라스틱 캐리어를 닫을 때 쓰는 지퍼 역시 합성수지로 만든 천과 철이 붙어있습니다. 바퀴도 마찬가지고요.
폐기물 처리업체에서 이를 일일이 나누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수지타산이 맞지도 않고요. 경기 화성시의 폐기물 처리업체 관계자는 “캐리어는 워낙 내구성이 좋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람이 재질별로 떼어내기란 쉽지 않다”며 “캐리어에 쓰인 플라스틱의 재질을 확인하기도 어려운 데다 보통 재생원료로 잘 쓰이지 않는 재질이라 잘 팔리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 캐리어는 강도를 높이기 위해 여러 재질의 플라스틱을 혼합해 만들다 보니 재활용이 어렵습니다. 이는 천 재질의 캐리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볼 땐 그냥 면직물 같지만 플라스틱으로 만든 합성소재니까요. 또 딱딱한 캐리어에 주로 사용되는 폴리카보네이트(PC)라는 재질은 제조 시 비스페놀A라는 환경호르몬 물질을 사용하기 때문에 재활용이 꺼려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분별 재활용을 시도해 볼 수는 있을 겁니다. 캐리어 중에는 ABS라는 재질로 제작된 것도 있는데요. ABS는 자동차 내부 등에 쓰이는 고기능성 플라스틱이라 재활용 수요가 있거든요.
문제는 사람이 일일이 분리하기엔 비용이 든다는 겁니다. 미국의 민간 재활용 기업은 여행용 가방을 재활용하는 서비스인 ‘제로 웨이스트 박스’를 판매 중인데요. 박스에 캐리어를 담아 보내기만 하면 재활용할 수 있는 부분은 알아서 다 처리해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형 캐리어용 박스가 121달러, 우리 돈으로 15만 원이나 됩니다. 대형 박스는 290달러, 37만 원이고요. 재활용 박스 가격이 새 캐리어 가격을 훌쩍 뛰어넘는 거죠. 환경을 위하는 마음만으로 선뜻 지불하기엔 큰돈인데요. 그만큼 캐리어를 분리하는 인건비가 만만치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생산 단계에서부터 재활용 가능한 구조로 만들어야
다행히 캐리어는 수명이 5~10년으로 긴 편입니다. 내구성이 좋은 캐리어를 사서 잘 관리하고 오래오래 쓰는 것이 가장 친환경적인 방법이겠죠. 그렇지만 여행객이 많아지면서 캐리어 폐기물은 꾸준히 발생하고 있습니다. 인천공항에 따르면 공항에 버려지는 캐리어가 하루 평균 30개 정도라고 합니다. 1년으로 치면 1만여 개의 캐리어가 버려진다는 건데요. 다른 공항은 물론 가정에서 버려지는 것을 합하면 어마어마한 양이 될 겁니다.
비록 재활용은 어렵지만, 캐리어를 재사용하려는 시도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2019년 한화토탈은 버려진 캐리어를 개조한 강아지 보금자리를 서울 관악구의 유기견 입양카페인 ‘행동하는 동물사랑 입양뜰’에 전달했습니다. 캐리어를 반으로 나눈 뒤 여기에 푹신한 침구를 깔아 미니 침대로 만든 거죠.
해외에서도 캐리어를 이처럼 동물보호소에 기부하거나, 노숙인 또는 구호단체에 보내는 자선활동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습니다. 캐나다의 자선단체인 ‘낫 저스트 투어리스트(Not Just Tourists)’는 의료인프라가 부족한 지역에 붕대나 주사기, 제세동기 등 필수 의료용품을 보내는 활동을 하고 있는데요. 여행객들은 폐기가 임박한 캐리어에 의료품을 담아 여행길에 캐리어째로 전달하는 자원봉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캐리어는 소각되는 대신, 각국 구호단체에 전달돼 비상약 저장소로 사용되는 거죠.
아예 재활용 플라스틱으로 만든 캐리어를 사용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 최근에는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 열풍과 함께 이 같은 재생 소재로 만든 캐리어를 판매하는 기업들이 많아졌죠. 하지만 재생 소재 캐리어 역시 수명이 다한 뒤 재활용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인데요.
문제를 해결하려면 제작 단계에서부터 분리배출과 재활용이 용이한 제품을 만드는 게 중요할 겁니다. 2020년 대만 타이난응용과기대 연구팀은 실제로 이 같은 조립형 캐리어 ‘리타(RHITA)’를 디자인했습니다. 캐리어의 각 부분을 마치 레고블럭처럼 설계한 뒤 쉽게 붙였다 뗄 수 있게 한 겁니다. 캐리어가 수명을 다하면 몸통, 바퀴, 손잡이 등 각 부분으로 나눠 분리배출할 수 있고, 손잡이 등 특정 부분이 고장 나면 그것만 갈아 끼울 수 있습니다. 연구팀은 기존 캐리어에 비해 부품 수를 70% 줄여 재활용 용이성을 더 높였다고 해요.
이들의 디자인은 세계 3대 디자인상인 iF어워드에서 우수작으로 선정됐는데요. 심사위원들은 “산업 디자인의 최대 난제인 재활용, 지속가능성에 대해 가장 효과적인 답을 제시한 작품”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아쉽게도 이 조립형 캐리어는 실제 제품으로 출시되진 않았는데요. 언젠가 이런 캐리어가 상용화돼서 재활용 걱정 없이 여행할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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