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세봉 '동아시아 엑스포의 역사-메가 이벤트의 감성공학'
편집자주
사회가 변해야 개인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때로 어설픈 희망을 품기보다 ‘사회 탓’하며 세상을 바꾸기 위한 힘을 비축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민낯들' 등을 써낸 사회학자 오찬호가 4주에 한 번 ‘사회 탓이 어때서요?’를 주제로 글을 씁니다.
1993년 10월 12일 화요일 삼성라이온즈와 LG트윈스의 플레이오프 3차전이 있었다. 신인 투수 이상훈이 삼진 10개를 잡으며 앞으로의 전성기를 예고한 날이기도 했다. 그날 학교에서 단체로 엑스포(세계박람회) 견학을 갔었다. 대전에서 대구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이어폰으로 라디오 중계를 듣던 내 모습이 또렷하다. 종일 박람회장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다만 감정은 남아 있다. 한국이 대단하다고 느껴야만 했다. 우주의 기운이 그랬다. 그해 대형사고가 참으로 많았다.
“엑스포에서 과학기술을 찬양하고 있을 때, 엑스포 바깥에서는 과학기술의 소산인 열차, 비행기, 배에 의하여 대형사고가 연속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동아시아 엑스포의 역사, 396쪽)
이후 엑스포는 가끔씩 뉴스를 통해 인지했다. "00 엑스포에서 무엇이 소개되었다"고 하면 신기하다고 반응했을 뿐이다. 어디에서 하는지는 큰 관심이 없었다. (투표로 결정되는) 등록 엑스포의 최근 개최지였던 중국 상하이(2010년), 이탈리아 밀라노(2015년), 아랍에미리트 두바이(2021년)와 이 도시가 속한 나라들이 전과 후로 다른 의미를 부여받았던가? 예전이라면 "우와 상하이!" "역시 밀라노!" "대단한 두바이!"라면서 감탄할 수도 있었겠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새로움을 접하는 자체에 만족한다. 그게 엑스포의 본래 역할일 거다.
오버도 이런 오버가 있을까. 부산 엑스포 유치 실패는 유치를 실패해서 문제가 아니다. 21세기에 20세기처럼 엑스포 유치에 사활을 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모습을 볼 줄은 몰랐다. 간절하면 그럴 순 있는데,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아니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느낌이 더 강했다. 천명해 놓고 밀어붙이는 국가주의적 사고방식이 너무 티가 나니까 적극적으로 응원하기도 민망했다. 유치를 염원한 진정성을 폄훼하는 것 같아서 시대착오적이라고까지는 표현하지 않겠다. 하지만 하나는 묻고 싶다. 그렇게까지 들뜬 이유가 무엇일까?
책 '동아시아 엑스포의 역사'는 ‘과시’가 목적이었던 170년 엑스포의 역사와 맥락이 어디에서든 지속되고 있음을 짚어준다. 스스로를 잘났다고 여기는 서구의 오만함은 인종을 전시하는 무례함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동양의 문화는 서양의 규모에 비교돼 폄훼당했다. 가능했던 이유는 들뜨지 않았던 엑스포가 없었기 때문이다. 엑스포는 프레임이 단호하다. 최초, 최고, 최대, 최신의 수식어와 함께 기술을 찬양한다. 그 안에서 기술의 부작용 따위를 논할 여유는 없다. 부제가 ‘메가 이벤트의 감성공학’인 이유이기도 하다.
개최하면 일단 주목받기에 정부와 지자체는 일자리가 몇만 개 창출되고 경제 효과는 얼마라면서 막무가내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렇게 들떴으니 유치 실패 원인도 감정적으로 찾는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오일머니를 뿌렸다는 식의 분석은 빈약하고 부끄럽다. 어쩌면 우리에겐 자격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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