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터가 1년간 삭제한 영상물 21만 건
황의조 입건 후 신규상담 폭발적 증가
삭제 힘들게 하는 법적 장애물도 여전
이민지(가명∙24)씨는 지난해 봄 온라인 구직사이트에서 '피팅 모델' 모집 공고를 보고 응모해 합격했다. 촬영에 들어간 뒤 노출 요구는 갈수록 심해졌고 걱정도 커졌다. 그때마다 업체 측은 "계약서에 도장 찍지 않았느냐" "모자이크를 하겠다" 등 어르고 달래며 그를 붙들어 놓았다.
불안감은 현실이 됐다. 1년 뒤 이씨가 본인의 사진을 마주한 곳은 다름 아닌 성인사이트였다. 급한 대로 사설업체에 수십만 원을 주고 삭제를 의뢰했으나, 반년도 안 돼 촬영물은 또 올라왔다. 이씨는 "불법촬영 사건이 터질 때마다 가슴이 무너지고, 내가 없어져야 고통이 끝날 것 같다"며 울분을 토했다.
최근 축구 국가대표 황의조의 성관계 영상 유출 사건으로 '불법촬영' 범죄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세간의 관심은 유명인의 사생활을 둘러싼 온갖 가십에 집중될 뿐, 피해자의 고통은 뒷전이었다. 지금도 수많은 민지가 평생의 낙인으로 남을지도 모를 나쁜 흔적을 지우기 위해 신음하고 있다.
아무리 지워도 되살아나는 몰카 영상
불법촬영, 속칭 '몰카' 범죄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통계가 있다. 6일 한국여성인권진흥원에 따르면 산하 디지털성범죄피해자지원센터가 지난해 삭제를 지원한 불법촬영물은 21만3,602건에 달한다. 전년(16만9,820건) 대비 25.8% 급증한 수치다. 센터가 문을 연 2018년(2만8,879건)과 비교하면 무려 7배 넘게 늘었다. 지난해 설치된 서울시 디지털성범죄안심지원센터에도 올 10월까지 벌써 6,190건의 삭제 지원이 이뤄졌다. 문기현 서울안심지원센터장은 "동영상 하나가 100개 이상 사이트에 퍼진 사례도 있었다"며 "'황의조 사건' 이후 신규 상담이 쇄도해 증가폭은 더 가팔라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공공기관이 도움을 준 피해자만 이 정도니 실제 범행 규모는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상대방 몰래 찍는 불법촬영물 특성상 피해 사실을 곧장 알지 못할 때가 많고, 뒤늦게 인지하더라도 이미 영상물이 온라인에 퍼진 후인 탓이다. 서울안심지원센터 조사 결과에서도 전체 의뢰자의 20~30%에게서 추가 피해 영상물이 보고됐다. 문 센터장은 "이른바 '디지털 장의사'로 불리는 사설 삭제업체를 찾았다가 센터 문을 다시 두드리는 분들도 꽤 있다"고 말했다.
삭제 기한 규정 없어 업체들 '나 몰라라'
피해자는 계속 느는데, 신속한 범인 검거와 피해자 지원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한둘이 아니다. 우선 불법영상물 업로드 수법이 지능화하면서 적발이 여간 까다롭지 않다. 감시망을 피해 주말 밤늦은 시간에 잠깐 올리거나, 시간 간격을 두고 재유포하는 식이다. 박성혜 디지털피해자지원센터 삭제팀장은 "9월 기준 센터가 관리하는 사이트만 3만5,000여 개에 이른다"면서 "24시 크롤링 시스템으로 모니터링 요원들의 공백을 메우는 중"이라고 말했다.
삭제 요청을 받는 업체들의 비협조도 문제다. 전기통신사업법상 피해 촬영물 유통방지 의무가 있는 곳조차 "불법 판단이 어려우면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심의를 요청할 수 있다"는 규정을 악용해 버티기로 일관하기 일쑤다. 여기에 현행법에 사업자의 의무 삭제 기한도 명시돼 있지 않아 피해 확산을 부추긴다는 비판이 나온다.
빠른 영상 확산 속도와 제도적 제약 등을 감안해 대안으로 인공지능(AI) 기술을 접목하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지만, 화질에 따라 정확도가 떨어질 수 있어 역시 최종 판독은 사람의 손을 거쳐야 한다. 박 팀장은 "피해 사실이 접수되면 3년 동안은 일주일 주기로 사후 모니터링을 해야 하는데, 업무 전담 정규직은 10여 명에 불과해 1인당 100명 넘는 피해자를 담당하는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신속하고 완벽하게 피해를 복원하려면 제도 개선과 인력 충원이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당장 인터넷사업자의 의무조치 기한을 방심위 이의신청 기한과 동일한 15일로 만들어 전기통신사업법의 실효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디지털피해자지원센터 관계자는 "국내법이 적용되지 않는 해외서버 삭제를 확대하기 위해 국외 유관기관과의 공조 강화도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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