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영국 BBC 아나운서 질 댄도 피살 사건
1990년대 영국인들 사랑 받은 '국민 아나운서'
봄날 정오 무렵 자택 현관 앞서 총격 살해당해
용의자 2500명 조사... 진범은 25년째 오리무중
"너무 유명한 인물인 탓에 오히려 미제로 남아"
허위 제보·사생활 폭로 등 흥미거리로 소비돼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1999년 4월 26일. 정오 단신 뉴스를 준비하고 있던 영국 BBC방송 보도국에 속보로 다룰 만한 사건 소식 하나가 전해졌다. 런던 부촌에 사는 한 젊은 여성이 자택 현관 앞에서 살해됐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분주할 법한 뉴스 스튜디오는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찜찜한 소문’이 따라붙은 탓이다.
그리고 몇 분 뒤, 소문은 사실로 확인됐다. 그날 BBC 정오 뉴스는 이렇게 시작했다. “조금 전 경찰은 BBC 아나운서 질 댄도가 웨스트런던 자택 바깥에서 흉기에 찔렸고, 구급차 안에서 사망했다고 밝혔습니다.” 전날에도 이 스튜디오에 섰고, 몇 시간 후 다시 인사할 줄 알았던 동료가 끔찍하게 살해됐다는 비보였다.
질 댄도(사망 당시 38세)는 1990년대 영국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국민 아나운서’였다. BBC에서 보낸 10여 년 동안 아침과 점심, 저녁 모든 시간대의 뉴스 앵커로 일했고, 팬층이 두터웠던 범죄 추적 프로그램과 여행 예능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게다가 1997년 교통사고로 숨진 고(故) 다이애나 왕세자빈을 닮은 미모로 ‘선샤인 걸(sunshine girl·햇빛 같은 소녀)’이라는 별명까지 갖고 있었다. 사건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과 구급대원들 모두가 댄도를 알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그의 죽음에 애도 성명을 냈을 정도였다.
그러나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방송인을 대낮 주택가에서 살해한 범인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런던 경찰은 댄도 피살 사건 수사를 ‘옥스보로 작전’이라 명명하고, 대대적 수사에 나섰다. 반년 동안 용의자로 조사받은 사람은 2,500명이 넘었다. 언론은 이 모든 과정을 하나의 TV쇼처럼 중계했다.
현관에서 처형되듯... 30초 만에 몰아친 살인
죽음은 따뜻한 봄날, 예고 없이 닥쳤다. 그날 오전 11시 32분, 댄도는 런던 풀럼 가윈가의 자택 현관 앞에 섰다. 오랜만에 들른 집이었다. 약혼자와 동거를 시작한 후엔, 매물로 내놓아 평소엔 잘 찾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이전트가 이곳에 있는 팩스 번호로 계약서를 보내는 바람에, 전송된 사본을 챙기러 와야만 했다.
댄도가 문의 잠금장치에 열쇠를 꽂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뒤에서 그의 몸을 잡아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러고는 쓰러진 댄도의 왼쪽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눈 뒤,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다소 부정확한 정보들도 담겨 있던 BBC 뉴스 속보와는 달리, 댄도는 이 한 발의 총격으로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불과 30초 만에 이뤄진 살인이었다.
범인을 목격한 사람은 있었다. 옆집 이웃인 리처드 휴즈는 “(댄도의) 차가 집 앞에 도착하고 나서 얼마 안 돼 여성의 비명소리를 들었다”며 “한 남자가 거기서 빠져나왔다”고 말했다. 30대, 180㎝ 정도의 키에 흑발이었던 남자는 어두운 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고 했다. 한 주차 단속원도 불법 정차된 파란색 레인지로버에 과태료 딱지를 떼려 하자, 같은 외양의 남성이 이를 뿌리친 채 차를 몰고 가 버렸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경찰 수십 명이 투입돼 근방을 수색했으나, 도망친 용의자나 파란색 레인지로버를 찾을 수 없었다. 범행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한 사람도, 하다못해 총성을 들었다는 증언도 나오지 않았다.
①에이전트 ②치정 ③세르비아 군벌... 범인은?
런던광역경찰청은 우선 430여 시간 분량의 폐쇄회로(CC)TV 영상을 분석했다. 사건 당일 댄도의 모든 행적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일단 ‘미행당하고 있었던 건 아니다’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렇다면 면식범 소행일 가능성이 컸다. 당시 댄도는 약혼자였던 산부인과 의사 앨런 퍼딩의 집에서 동거 생활을 했다. 살인 사건 현장이 된 풀럼의 자택을 방문한 건 수개월 만이었다. 경찰은 그날 댄도의 자택 팩스로 계약서를 보낸 에이전트 존 로즈먼을 가장 먼저 조사했다. 그를 의심할 만한 이유는 또 있었다. 로즈먼의 취미는 소설 쓰기였는데, 습작 중 하나가 댄도 사건을 연상시켰다. 에이전시 일을 하는 주인공의 고객들이 잇따라 살해되는 이야기로, 피해자가 총을 맞아 숨지는 내용도 담겨 있었던 것이다.
댄도의 직장 동료들은 그의 옛 연인인 밥 휘튼 BBC 프로듀서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직장에선 상사였던 휘튼이 매사에 댄도를 통제하려 했고, 댄도가 이별을 통보한 게 범행 동기가 됐을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또 헤어지기 직전 댄도가 휘튼에게 이체한 35만 파운드(약 5,742만 원)의 성격도 수상해 보였다. 하지만 로즈먼과 휘튼 모두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가 확인됐다. 직접적인 살인 동기, 범행 공모 정황도 없어 용의선상에서 제외됐다.
경찰은 현장 증거로 다시 눈을 돌렸다. 부검 결과, 범인은 구경 9㎜의 반자동 권총을 사용했고, 총알을 발사하는 순간 댄도의 머리에 총구를 깊숙하게 누른 것으로 드러났다. 영국 가디언은 탄도 전문가를 인용해 “총기 발포 시 터지는 가스가 머리 내부에서 폭발해 총성이 크게 울리거나, 피가 튀지 않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총기 사용에 능한 ‘프로’의 솜씨일 공산이 크다는 뜻이다. BBC도 “전문 범죄자에 의한, 매우 계획적이고 정확한 살인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사건 발생 이튿날인 4월 27일 BBC에 걸려 온 ‘장난 전화’가 다시 주목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세르비아 억양의 남성은 “너희들의 총리 (토니) 블레어는 무고한 17명을 살해했다. 도살은 도살로 갚는다”며 “어제 첫 번째 복수가 완성됐다”고 말했다.
1999년 남유럽 발칸반도에선 세르비아가 코소보 독립을 막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영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도 참전했는데, 그해 4월 23일 나토 미사일이 세르비아 RTS 방송국을 강타하면서 기자 10여 명이 숨졌다.
이에 탐사보도 기자 밥 워핀덴 등은 “RTS 폭격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세르비아 강경파가 영국의 대표적 언론인을 암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댄도는 살해 3주 전 방송에서 코소보 난민들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원을 촉구했다. 코소보에서 ‘인종 청소’를 하던 세르비아 군벌에겐 눈엣가시로 비쳤을 수 있다.
사건 발생 20년 후인 2019년, 영국 국가범죄정보국(NCIS)도 세르비아 배후설을 암시했다. NCIS는 보고서에서 “반(反)군벌 성향의 세르비아 기자 슬라브 코두루비자도 댄도가 죽기 며칠 전,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살해됐다”며 “올해 세르비아 비밀경호국 소속 요원 4명이 코두루비자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밝혔다.
‘닮은꼴’ 다이애나빈 스토커, 체포됐지만...
경찰은 댄도 피살 1년 후인 2000년 5월, 한 남성을 유력 용의자로 체포했다. 사건 현장으로부터 약 1㎞ 떨어진 곳에 살고 있던 배리 조지(39)였다. 그의 코트 주머니에서 발견된 총기 발사 잔여물 입자가 댄도 살인에 사용된 탄약과 일치한다는 이유였다.
조지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고, 강간 미수와 성추행, 스토킹 전과가 있었다. 가디언에 따르면 그는 특히 유명인에게 심하게 집착했다. 댄도의 닮은꼴로 꼽혔던 다이애나빈도 그중 한 명이었다. 조지는 1983년 다이애나빈이 머물던 켄싱턴궁에서 사냥칼과 밧줄을 들고 숨어 있던 중 체포된 전력이 있었다.
게다가 조지의 자택에선 수상한 물품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여성 418명을 촬영한 사진 2,000여 장은 물론, BBC 여성 기자들의 주소 및 연락처가 정리된 문서, 총기를 들고 있는 본인 사진 등이었다. 조지는 “댄도를 잘 모르며, 어디 사는지도 모른다”고 진술했으나, 경찰은 이를 믿지 않았다.
결국 조지는 댄도를 살해한 혐의로 법정에 섰다. 변호를 맡은 마이클 맨스필드 변호사는 “아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어 꼼꼼한 계획이 필요한 완전범죄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며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배심원단은 발사 잔여물을 핵심 증거로 인정해 2001년 7월 유죄 평결을 내렸고, 재판부는 조지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8년 뒤 열린 재심에선 무죄 판결로 뒤집혔다. 조지가 투옥돼 있는 동안, 검찰 측이 제시했던 유일한 증거물인 발사 잔여물이 오염 가능성 때문에 더는 과학적 증거로 간주되지 않는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2008년 8월 조지는 석방됐고, 사건 발생 25년을 맞은 지금까지도 댄도를 살해한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독이 된 유명세... 오락으로 전락한 죽음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누가 질 댄도를 죽였나’(2023)는 피해자가 너무나 유명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사건이 미제로 남게 됐다고 지적했다. 많은 이들이 단순히 관심을 끌기 위해 허위 제보를 했다. 수사 초기 오염된 증거들로 인해 경찰은 상당한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게 됐다.
‘다이애나빈 사망 이후 가장 충격적인 죽음’이라며 살인 사건의 모든 것을 대서특필한 언론들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독자나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으려는 목적에서 확인되지 않은 팩트를 키워서 보도하고, 범인 찾기를 빌미로 댄도의 연애사 등 사생활을 적나라하게 까발렸다. 인기 여성 앵커의 참혹한 죽음은 그렇게 거대한 오락거리로 전락했고, 사건의 진실은 지금도 미궁 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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