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프랑스혁명의 거두 조르주 당통이 단두대로 끌려갈 때 동지이자 권력자인 로베스피에르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다음은 네 차례야.”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혁명의 불씨를 댕겼던 당통은 혁명파와의 갈등 끝에 '인민의 적(Enemy of People)'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혁명수호 명분으로 설치된 공안위원회도 실은 그가 만든 기관으로 공포정치의 대명사가 됐다. 증거가 아닌 심증만으로도 수만 명이 처형됐다. 로베스피에르도 공포정치에 질린 민심이반과 쿠데타로 단두대에 섰다.
□인민의 적을 반대자에게 무자비하게 활용하기로는 이오시프 스탈린을 빼놓을 수 없다. 소련의 대숙청(1937~1938년) 시기 처형된 이가 100만 명 이상이다. 스탈린은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은 모든 이를 인민의 적이라 불렀다. 그는 해외로 도망간 정적 트로츠키를 쿠바까지 쫓아가 도끼로 암살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가 격하 운동과 함께 인민의 적 개념을 비판하면서 점차 사라졌다. 마오쩌둥 시대의 중국이나 김일성 시대의 북한에서도 사형과 유배를 뜻하는 정치적 낙인이다.
□혁명의 광기이자 흑역사인 ‘인민의 적’은 로마 시대까지 올라갈 정도로 유래가 깊다. 혁명이념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 그 홍수에 휩쓸린 무고한 이들이 인민재판과 사법살인을 당했다. 이 불경스러운 말이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입에서 나오고 있으니 민주주의 산실인 미국의 정치권도 혼란에 빠졌다. 전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머그샷을 찍었던 트럼프는 4건의 형사사건 기소와 소송과정에서 더 독기에 찼다.
□트럼프는 자신에게 비판적인 케이블뉴스 MSNBC와 NBC뉴스, 모기업 COMCAST를 두고 국가반역 혐의로 조사해야 한다고 위협했고, 비판적 미디어를 싸잡아 ‘인민의 적’이라 했다. 최근 폭스뉴스 인터뷰에선 대통령이 되면 권한을 남용하거나 적을 처벌하는 데 정부를 이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임기 첫날만 빼고”라고 대답해 질문자를 당혹하게 했다. 독재자 본능을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트럼프인데도 공화당 내에서는 적수가 없고, 차기 대선 여론조사 결과는 그에게 기우는 판세다. 정말 세계는 '전혀 새로운 미국'을 경험할 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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