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레스 전 대통령의 NCND 전략
이스라엘 지키고 평화협정까지 이끌어
한반도 북핵 대응 전략에도 참고해야
정확하게 63년 전인 1960년 12월 18일 미국 연방원자력연구위원회와 각국 언론들은 일제히 특보(特報)를 냈다. 한 작은 나라가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으며 그 나라는 '이스라엘'이라고 지목했다. 보도는 건설 현장 모습이 찍힌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소련 정찰기가 이스라엘 디모나 현장을 촬영하고, 소련 외교부 장관은 워싱턴을 방문해 미국의 개입을 요청했다. 다비드 벤구리온 당시 이스라엘 총리는 ‘네게브 사막에 건설 중인 연구용 원자로는 오직 평화적인 목적으로 설계되었다’고 해명에 나섰다.
2년여 논란 끝에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은 이스라엘 핵 개발 총책인 시몬 페레스를 백악관으로 불렀다. 그리고 ‘핵무기에 대한 이스라엘의 의도는 무엇인가?’라고 페레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페레스는 “각하, 제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중동에서 핵무기를 처음으로 꺼내 드는 쪽이 절대로 저희는 아닐 것이라는 점입니다”라고 답변했다. 케네디는 답변에 만족했는지 혹은 체념했는지 핵문제를 더 거론하지 않고 면담을 끝냈다(작은 꿈을 위한 방은 없다, 시몬 페레스, 2017). 그리고 핵무기의 존재를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은 페레스의 '핵 모호성(NCND)' 입장은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핵정책이 됐다.
페레스는 1956년부터 프랑스 정부를 집요하게 설득해 이듬해 여름 파리에서 비밀 핵 개발 지원 협약을 체결하고 원자로 건설 공사를 시작했다. 이후 프랑스의 총리가 계속 바뀌면서 협약이 파기될 뻔한 절체절명의 위기에도 몰렸다. 그러나 페레스는 ‘협약이 파기되고 내용이 공개돼 프랑스가 이스라엘 핵 개발을 지원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아랍 전체가 프랑스를 적대시할 것’이라고 설득과 압박을 가했다. 그리고 마침내 프랑스는 예루살렘의 요구를 수용했다. 페레스는 핵 기술을 제공한 파리는 중동 국가를 활용해 돌파했고, 워싱턴의 반대는 핵 모호성 전략으로 무마시켰다.
페레스는 ‘A국가가 B국가를 무너뜨리려면, 정복 의지와 군사력 우위가 필수’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핵 시설은 주변 국가들로 하여금 군사력 비교를 어렵게 만들어 오히려 전면전을 막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에 척박한 이스라엘 모래땅에 원자력 에너지 기술을 확보하는 것은 중차대한 과업이라고 주변을 설득했다. 페레스가 핵 개발을 구상했을 때 모사드 등 정보기관은 소련의 개입을 의식해 반대했다. 또 과학자와 기술자는 터무니없는 계획이라고 반발했고 경제관료들은 막대한 재원을 조달할 수 없다고 일축했다. 하지만, 미래를 내다본 벤구리온 총리는 젊은 애국자의 충정을 수용했다.
페레스는 10번의 장관, 3번의 총리 및 대통령까지 지냈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평화협정을 맺은 공로로 1994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의 핵 개발 추진 막전 막후 스토리를 끄집어낸 것은 한반도 안보 상황이 예기치 않게 흘러갈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스라엘과 한반도의 상황은 다르고 우리는 유대 시오니즘 네트워크도 없다.
하지만 11개월도 안 남은 미국 대선에선 트럼프의 재집권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다. 그는 방위비 부담금을 5배 올리고 북핵 용인에 대해 빅딜도 가능하다는 소문이다. 2만8,500여 명의 주한 미군을 유지하는 미국 국방수권법이 2025년에도 합의될지 미지수다. 4월 워싱턴 선언의 확장억제가 요동칠 수 있는 만큼 북핵 대응에서 페레스의 선견지명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갑진년 푸른 청룡의 해는 국제 정치에서 격변이 시작되는 한 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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