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탱크 4, 5대가량 전소됐다. 현재 교차로에 있다. 지원을 요청한다."
지난해 2월. 미국의 인공지능(AI) 소프트웨어 회사 '프라이머'는 자사의 AI가 분석한 러시아군의 무전 내용을 공개했습니다. 자료에는 전차 전소로 당황스러워하는 러시아군의 음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AI전쟁, 현실이 되다
레이더 기술과 핵기술이 2차 세계대전의 판도를 바꿨다면, 현대전의 판도는 AI와 위성정보에 달렸습니다. 우크라이나 내무부 장관은 미국 타임지에 "AI 기술은 우크라이나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선전할 수 있었던 비밀 무기"라고 했죠. 우크라이나는 국방 전문 AI 소프트웨어 회사 '팔란티어'가 제공하는 러시아의 진지와 병참 보급선 위치를 통해 보다 정밀하게 타격할 수 있었습니다. 일론 머스크의 우주기업 '스페이스엑스'의 위성통신 서비스 '스타링크'로 통신망을 유지해온 덕분입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AI와 우주기술의 위력이 확인되면서 우리 군에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정부는 '국방혁신 4.0'을 발표하며 2040년까지 AI 과학기술 강군으로 거듭나겠다고 했습니다. AI 기술이 기존 무기체계와 결합‧융합하고 있는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는 위기감이 엿보입니다.
장병 인력, AI로 대체 꿈꾸지만…데이터 공유부터 '첩첩산중'
"현재 우리의 기술 순위는 미국, 중국보다 낮은 게 현실입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무기체계가 무엇이고, 우리도 할 수 있는 싸움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6일 서울 서초구 국립외교원에서 열린 '제2차 기술안보세미나'에서 국내 드론 전문 양산업체 니어스랩의 나호영 기술전략팀장은 이같이 말했습니다. AI 기술 확보를 위한 인프라와 예산, 기술, 양산능력 무엇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강대국 따라잡기에 급급해선 안 된다는 것이죠. 신뢰할 수 있는 통신 인프라와 데이터, 무기 양산 능력을 확보하려면 우선적으로 우리 군사전략에 맞는 AI 기술이 무엇인지를 정의해야 하는데 이런 기초작업마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군도 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최근대 육군교육사령부 미래작전환경분석 장교는 국방부가 AI 기술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로 저출산으로 인한 병역자원 부족과 북한의 비대칭 위협을 꼽았습니다. 그러나 "AI로 어떤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하고 활용할 것인지 그 개념 정의가 미흡하다"고 한계를 토로했죠. 정부가 추구하는 방향성 자체가 모호하다 보니 최신 무기의 실전배치는 늦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부족한 병역 자원을 AI로 대체하고 싶어도 당장 기본적인 데이터와 망 관리를 어떻게 할지 방향이 잡혀 있지 않습니다. 국방부는 군사기밀을 다루는 조직이기 때문에 내부망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관리하죠. AI를 활용하려면 클라우드 등을 통해 관련 기술업체에 데이터를 제공해야 하는데 법적으로 공유가 될 수 없는 구조입니다. 미국처럼 세부적으로 데이터를 분류해 공유할 수 있는 제도와 법이 정비되지 않는 이상, AI강군은 꿈에 불과한 것이죠.
두진호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 연구위원은 "병역자원을 기술진보가 대체해줘야 하는 필연적인 상황에 직면했다"며 "이에 맞는 무기획득체계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법체계뿐만 아니라 전력지원 및 무기획득체계도 선진화돼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휴전이라는 특수하고 급박한 한반도 안보환경에서는 보다 신속한 전력지원체계와 무기획득체계가 필요한데 사업타당성을 평가하고 행정절차를 거치는 데에만 10년이 넘게 걸린다는 것이죠.
데이터 공급망을 둘러싼 안보적 딜레마
AI 기술의 발달은 우리가 풀어야 할 외교안보적 난제를 더 복잡하게 하고 있습니다. 윤정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핵심신흥기술은 국가주권과 지정학적 지배력에 급속한 변화를 초래했다"며 "국제관계와 전략적 동맹 결성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지난해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초기 독일의 가전제품 매장 '메디아 마르크트'는 세계 최대 드론 제조업체인 중국의 DJI가 우크라이나군이 사용한 드론에 입력한 위치 정보를 러시아군에 넘기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며 판매제품에서 제외한 일이 있었습니다. 중국 DJI업체는 '완벽한 허위'라고 반발했지만, 이 사건으로 데이터를 둘러싼 전시 공급망 논쟁에 불이 붙었죠. 그럼에도 우크라이나는 저렴한 중국 드론에 의존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중국이 수출 통제에 들어가면서 전선 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독자적인 첨단기술을 확보하지 못하는 국가는 기술을 확보한 국가에 안보가 좌지우지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한국과 같은 중견국은 미국만큼의 방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소프트웨어적인 측면에서 미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기 쉽습니다. 한미 AI 기술협력은 한미동맹 심화와 진영구도 가시화라는 양날의 검인 셈이죠.
반대로 우크라이나처럼 가격경쟁력을 이유로 안보이익을 공유하지 않는 국가에 첨단장비를 의존할 경우, 정말 중요한 순간에 기술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첨단무기가 전력화하면 할수록, 한국의 지정학적 환경은 기술협력국을 중심으로 블록화하는 구도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국가뿐만 아니라 특정 기업에 대한 의존도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일론 머스크가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흑해함대 공격을 막기 위해 스타링크를 일시 차단했다는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죠.
세계 28개국, AI 국제표준 필요성 공감했지만…어떻게?
첨단기술이 발전할수록 기술력을 확보한 강대국의 입지와 그 국가에 기술을 제공하는 기업의 영향력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기술 우위를 둘러싼 강대국 간 경쟁이 심할수록 동맹국끼리 연대해 그 기술을 물리적 분쟁에 동원할 가능성도 큽니다. 맨해튼 프로젝트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라는 결과를 가져온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AI를 둘러싼 미중 기술경쟁이 한창인 상황에서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AI를 평화적으로 이용하면서 우리 군사전략에 잘 접목시킬 수 있을까요?
지난 1일 미국과 중국, 한국, 유럽연합(EU) 등 28개국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한 ‘블레츨리 선언’에 서명했습니다. 28개국은 AI 기술에 대한 △국제 협력 △보편화된 안전기준 △윤리지침 마련 △투명성 제고 △국가 간 지식 공유 및 공동연구 장려 필요성에 동의했죠.
우리 국가이익에 맞게 AI 전력이 이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국제사회가 공동으로 AI를 통제·관리하는 메커니즘은 필요합니다. 문제는 방법론입니다. 어떻게 해야 당장 AI 무기를 투입하는 국가들이 추후 마련될 안전기준과 윤리 가이드라인에 따를까요? 28개국을 넘어 국제사회가 공동으로 동의하는 AI 안전기준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있을까요?
내년에 제2차 AI안전정상회의를 개최하는 정부 입장으로선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과학기술·군사·외교 분야 전문가들의 집단지성이 어느 때보다도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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