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직언론인 임재경, 신연숙, 현이섭씨
신군부의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흥행하면서 1979년 12·12군사반란 사태에서 이듬해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이르는 시기가 재조명되고 있다. 신군부는 권력찬탈 과정에서 군사작전처럼 언론을 장악했다. 보도 사전검열을 시작으로 검열에 반발하는 언론인 연행, 비판 언론인 강제해직, 언론 통폐합까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2021년 5 ∙18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80년 해직언론인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절차가 진행 중이다. 1997년 대법원이 전두환·노태우 재판판결에서 '언론학살'의 불법성을 확정하고 2000년 민주화특별법을 통해 300여 명이 민주화 관련자로 인정받았지만 보상은 전무해 이를 보완하기 위한 작업이다. 진실보도를 추구한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내몰리고 취업까지 제한됐던 해직언론인들의 간난신고한 삶을 생각하면 만시지탄이다. 보상신청은 올해 연말까지이지만 그사이 세상을 뜨거나 외국으로 가 연락이 두절된 이들도 많다. 지난 13일 서울 세종로 한국일보 본사에서 만난 1980년 해직언론인 임재경(87·전 한국일보 논설위원), 신연숙(69·전 한국일보 기자), 현이섭(74·전 한국언론재단 이사)씨는 “80년 언론인 강제해직에 대한 명확한 진상규명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임씨는 1975년부터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직하다 정치행동 금지라는 사규위반을 명분으로 80년 7월 해직됐다. 그는 “1972년 이후 김대중씨를 만난 일도 없는데 ’김대중 과도내각’ 명단에 내 이름이 들어가 있더라.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회사에서 소명기회를 1분도 주지 않고 파면해 소리를 질렀다”고 당시를 회상하며 “몇 명이 되든 불법적으로 해직시켰다면 정부가 부끄러움을 알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해직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해직자가 몇 명인지도 정확히 파악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1980년 10월까지 해직된 언론인은 933명인데 보안사가 직접 대상자로 지정한 숫자는 298명이다. 나머지는 언론사가 '정화'를 명목으로 자체적으로 선정해 끼워넣은 숫자다. 1996년 12·12 및 5·18 사건 특별수사본부 기소장에는 정부가 336명을 지목해 언론사에 통보했다고 돼있다. 올해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해직언론인은 256명이다. 대상자 숫자조차 기관마다 제각각인 셈. 사전검열에 반대하는 제작거부 농성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80년 8월 해직된 신씨는 “1975년 동아·조선일보 해직자들은 같은 회사 출신이라 서로 연락도 되고 파악이 쉬운데, 80년 해직자들은 100여 개사로 산재해 있어 소재 파악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며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등이 알음알음으로 연락해 법안의 취지를 알리고 보상신청을 하라고 독려하는데 겨우 100명 정도밖에 안 된다”고 고충을 호소했다. 당시 해직과정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 작업이 필요한 이유다.
이들은 당시 해직자는 보안사가 언론사가 준 명단에 각 언론사 사주들이 ‘눈에 가시 같은 기자들’을 끼워넣은 경우도 있었는데 그 사유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고 꼬집었다. 임씨는 “보안사가 언론사에 건네준 명단도 제작거부, 무능, 부조리 등 이상한 방식으로 구분돼 있다. 언론자유를 위해 힘썼는데 부조리로 분류돼 해직됐다면 기가 막힌 일 아닌가”라며 “누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명확히 밝혀 명예회복은 물론 가해자 처벌도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1980년 검열 거부에 동참했다가 현대경제일보(한국경제 전신)에서 강제해직된 현씨는 “5 ∙18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 이외에서 신군부에 저항했던 세력은 언론계가 유일했다”며 “뒤늦었지만 이번 기회에 강제 해직됐던 언론인들의 명예가 제대로 회복되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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