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밸리 이야기 <7>
'노숙인 도시' 오명과 싸우는 샌프란시스코
지난달 14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의 최대 번화가 유니언스퀘어. 이곳에서 만난 시민들은 하나같이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되게 깨끗해진 거리를 두고 한 말이었다.
이날은 1945년 연합국 회의 이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가장 큰 국제 행사인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개막 하루 전이었다. 시 당국은 21개국 정상이 모인 이번 APEC을 앞두고 한 달 넘게 대대적인 '도심 청소' 작업을 벌였다. 최대 난제는 도심을 점령한 노숙인을 도심과 최대한 멀리 이동시키고, 그들의 흔적과 악취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시 공무원들은 매일 밤 노숙인 텐트 밀집 지역을 두 곳씩 돌며 텐트를 철거하고 거리의 노숙인들을 가까운 보호시설로 옮겼다고 한다. 이를 위해 보호시설에 침대 약 300개를 확충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숙인 없는 거리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최근 찾은 샌프란시스코의 모스코니 센터(APEC 공식 행사장) 근처엔 APEC 기간 사라졌던 노숙인 텐트들이 다시 등장해 있었다. 악취도 코를 찔렀다. "대표적인 우범지역으로 꼽히는 텐더로인과 사우스오브마켓(소마) 지역의 (노숙인) 회귀 속도가 특히 빨랐다"고 지역 언론 샌프란시스코스탠더드는 짚었다. APEC을 통해 '노숙인 도시'란 오명을 벗겠다던 샌프란시스코시의 꿈은 결국 실현되지 못한 셈이다.
샌프란시스코의 노숙인 문제는 지난달 30일(현지시간) 열린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와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 간 양자 토론에도 등장했다. 공화당 대선주자인 디샌티스 주지사는 토론 중 "이건 샌프란시스코의 지도"라며 카메라를 향해 이미지를 들어 보이더니 "거리에서 사람의 배설물이 발견된 곳을 표시한 것인데, 거의 모든 곳이 (표시 마크로) 뒤덮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캘리포니아에는 다른 주에서는 누리지 못하는 자유가 있습니다. 공공장소에서 배변할 자유입니다. 고속도로 아래에 야영지를 만들고, 야외 마약 시장을 만들고, 마약을 사용할 자유도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시장 출신인 민주당 뉴섬 주지사를 정면 겨냥한, 통렬한 조롱이었다.
캘리포니아 노숙인 68%가 보호 없이 산다
샌프란시스코 등 캘리포니아의 노숙인 문제는 보수 진영의 오랜 타깃이었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공격 수위가 크게 올라갔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재임 시절만 해도 뉴섬 주지사 측은 연방 정부에, 공화당 정치인들은 캘리포니아 주정부에 그 책임을 돌렸다. 그런데 조 바이든 대통령 집권 뒤로는 이런 공방이 불가능해졌다.
공화당은 캘리포니아를 넘어 정부 비판에도 노숙인 문제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디샌티스 주지사는 지난 5월 쓰레기가 대량 방치된 샌프란시스코의 거리를 배경으로 "좌파 정책이 시민들의 삶의 질을 파괴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민주당 인사들은 '마타도어 때문에 캘리포니아의 현실이 지나치게 부풀려지고 실제보다 이미지가 나빠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디샌티스 주지사의 지적이 아주 과장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캘리포니아 인구는 미국 전체의 12% 정도를 차지하는데, 전국의 노숙인 중 캘리포니아에 사는 노숙인 비율은 30%에 이른다. 그보다 더 심각한 건 당국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는 노숙인(거리, 자동차, 버려진 건물 등에서 생활하는 노숙인)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이다. 미국 주택도시개발부(HUD)가 15일 발표한 전국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준 캘리포니아의 노숙인 약 18만1,000명 중 당국 보호 밖에 있는 이들의 비율은 68%나 됐다. 미 전역을 통틀어 가장 높은 수치다.
샌프란시스코는 로스앤젤레스와 더불어 캘리포니아 노숙인 문제에서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도시다. 공식적인 노숙인 수 자체는 7,000여 명으로, 약 80만 명인 전체 인구에 비해 아주 많은 편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공터가 적고 보행자가 많은 도시 특성상 노숙인들이 쉽게 눈에 띄는 상황이다.
저소득 탓 노숙인 되니 취업 더 어려워져... 악순환 고리
캘리포니아에 유독 노숙인이 많은 이유로는 주택 부족, 소득 불평등, 높은 집값, 온화한 날씨 등이 꼽힌다. 미국에는 캘리포니아 노숙인에 대해 막연한 고정관념도 있다. 돈을 벌거나 집을 가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노숙인으로 내몰린 데는 게으름과 같은 성향 탓이 크다는 얘기다.
그러나 캘리포니아대 샌프란시스코캠퍼스가 6월 발간한 보고서(캘리포니아주 전역 노숙 경험자 연구)는 캘리포니아 노숙인들을 향한 편견에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다는 점을 밝혀냈다. 연구는 2021년 10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3,200차례의 설문과 365번의 심층 인터뷰를 통해 이뤄졌다.
이에 따르면, 응답자의 6개월간 평균 가계 소득은 960달러에 불과했다고 한다. 원래 주택을 보유하고 있던 사람의 경우 은행 등으로부터 '집을 잃게 될 것'이란 통지를 받은 지 10일 만에 소유권을 잃었고, 임차인의 경우 퇴거 통지를 받은 날부터 실제 퇴거당한 날까지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뿐이었다고 한다.
또 응답자의 거의 대부분이 영구적인 집을 원한다고 답했고, 절반은 '적극적으로 일자리를 구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마고 쿠셸 수석연구원은 "일단 집을 잃으니 취업 기회가 줄었고 그렇게 빠져나오기 어려운 파멸의 늪에 빠졌다"고 했다.
노숙인들의 대부분이 마약에 빠져있다는 세간의 인식은 사실에 가까웠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깨어 있기 위해' 마약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쿠셸 연구원은 진단했다. 거리에서 잠들면 폭력을 당하거나 물건을 빼앗길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배고픔을 잊기 위해 약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응답자 중 20%는 '약물 치료를 원하지만 받을 수가 없다'고도 답했다고 한다.
연구진은 이런 결과를 바탕으로 노숙인 증가의 책임을 개인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에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캘리포니아주가 저소득층의 주택 접근성을 높이는 등 시스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임차 보조금을 확대해 노숙인이 되는 것을 사전에 예방하고, 집을 잃은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리지 않도록 임시 거처를 늘려야 한다고 쿠셸 연구원은 주장했다. 더 근본적으로는 주 전체에서 심각한 주택 부족 문제를 해결해 지나치게 높은 집값을 끌어내려야 한다는 게 그의 말이다.
"노숙인 문제, 캘리포니아 넘어 국가적 위기"
노숙인 문제에 온정적이란 비판을 받았던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지난해부터 부쩍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샌디에이고·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등에서 노숙인 밀집 지역을 없애거나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가동했다. 지난 10월엔 노숙인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법안에 서명했다. 주정부가 사들이거나 새로 짓는 등의 방식으로 캘리포니아 전역에 소규모 주택 1,200채 이상을 제공하겠다는 게 골자다. 이번 대책에는 약 3,000만 달러가 투입되며, 이를 통해 2025년까지 지역 내 노숙인 수를 약 15% 줄이겠다는 게 주의 목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노숙인 증가세가 둔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HUD는 2022년부터 1년 사이 캘리포니아 노숙인 수가 1만 명가량, 약 6% 정도 증가했다고 밝혔다. 이는 콜로라도(30.9%), 뉴욕(25.7%), 플로리다(17.4%)주 등보다 훨씬 낮은 수치였다. 같은 기간 미국 전역 노숙인(65만3,000여 명)이 약 12%(7만 명) 증가한 것을 감안하면 전국 평균보다 증가치가 낮았다는 사실은 캘리포니아에는 확실히 긍정적인 신호다. 비영리단체 올홈의 키어키는 "주 당국 등의 노력에 힘입어 노숙인 문제 해결에 진전이 있었고, 지역의 노숙인 증가를 억제시키는 데도 도움이 됐다"고 지역 언론 샌프란시스코크로니클에 말했다.
노숙인 문제가 더 이상 샌프란시스코와 캘리포니아에 초점이 맞춰져선 안 된다는 주장도 나온다. 샌프란시스코 노숙인 지원 담당 대변인 에밀리 코헨은 "HUD의 발표는 노숙인 문제가 연방 정부의 대대적인 투자를 필요로 하는 국가적 위기 상황임을 보여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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