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그레셤의 법칙은 소재 가치(순도)가 다른 화폐를 동일한 명목 가치를 갖는 화폐로 통용할 경우 소재 가치가 높은 화폐는 시장에서 사라지고 소재 가치가 낮은 화폐가 유통되는 현상을 이른다. 16세기 영국 금융가 토머스 그레셤이 제창한 것으로, 현재까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로 널리 쓰이고 있다. 16세기 당시 경제활동이 증가함에 따라 화폐 수요도 함께 늘었는데, 순수 금화와 은화 대신 금과 은 함량이 적은 화폐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순수 금화와 은화는 화폐시장에서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됐다.
□화폐시장뿐 아니라 정치에서도 그레셤의 법칙은 적용된다. 최근 초선인 오영환·이탄희·홍성국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총선 불출마 선언이 대표적 사례다. 소방관 출신 오 의원은 조국 사태 이후 민주당에서 첫 공개 사과를 했던 청년 정치인으로, 이 의원은 '윤석열 정부의 황태자'로 불리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에게 날카로우면서도 정제된 질의로 인상을 남겼다. 미래에셋대우 사장 출신 홍 의원은 정치권에서 금융 및 거시경제 전문가로 손꼽히는 인사다.
□이들은 2020년 21대 총선에서 영입 인재로 발탁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당 주류인 친이재명계 지도부와 강성 지지층의 눈도장을 받기 위한 정치를 하지 않았고, 불출마 선언에서 여의도에 만연한 '증오 정치', '진영 정치'라는 현실에 대한 회의와 무력감을 드러냈다. 혹자는 이들의 불출마가 자의에 의한 건지, 타의에 의한 건지를 따지기도 한다. 그러나 내년 총선에서 공천을 받기 위해 상대 정당을 과도하게 비판하거나 당내 문제에 입을 아예 닫아버린 대다수 여야 의원들과 다른 선택임은 분명하다.
□정치의 본령은 갈등 해결이다. 여야가 상대 당은커녕 당내 이견조차 포용하고 절충하지 못하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증오 정치에 기반해서는 내년 총선에서 승리를 거둘지 몰라도 난마처럼 얽힌 우리 사회의 갈등 해결까지는 난망하다. 실종된 정치 복원을 위해서라도 내년 총선에서 '악화 구축'을 위한 유권자의 선택이 중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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