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유럽연합과 미국의 대응: 유럽
플랫폼 기업 의무 강화 'DSA' 입법
편집자주
총선의 해인 2024년 정치 진영 간 적개심을 자극하는 허위정보나 아니면 말고 식 의혹제기 등이 더욱 기승을 부릴 전망이다. 이는 정치권이 대중 동원을 위해 손쉽게 활용하는 선동 수단이지만 지지자들 간 증오와 혐오감을 증폭시켜 정치 자체를 질식시킬 수밖에 없다. 이런 가짜뉴스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이에 대응하는 방안을 3회에 걸쳐 연재한다.
#1. "독일 작센하우젠 박물관이 우크라이나 난민을 수용하고자 합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5개월 차였던 2022년 7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퍼진 글이다. 나치 독일이 유대인 등 20만 명 이상을 강제수용하고 고문·박해했던 '끔찍한 장소' 작센하우젠 박물관에 전쟁 피해자를 묵게 한다는 뜻이었다. 박물관 명의로 게시됐고, 숙소로 바뀌었다는 사진도 올라왔다. 그러나 이 글은 가짜였다. 사진도 합성이었다.
#2. 지난해 7월 프랑스에선 이런 글이 퍼졌다. "긴급: 프랑스 정부가 곧 인터넷을 차단할 예정." 알제리 출신 소년이 경찰 총격에 사망하며 번진 전국적 시위를 저지하고자 인터넷을 끊는다는 뜻이었다. '보도자료' 문구가 붙은 문서도 돌았다. 그러나 이 역시 거짓이었다.
타인을 속이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허위정보'는 유럽에서도 골칫거리다. 허위정보야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각종 온라인 플랫폼을 타고 더 빠르고 널리 확산하는 게 문제라고 유럽연합(EU)은 봤다.
그래서 도입한 게 '디지털서비스법(DSA)'이다. 허위정보 제작을 막는 게 불가능하다면 플랫폼 기업에 유통을 막을 의무를 지우자는 취지의 법이다. EU는 인공지능(AI) 기술 발전 등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법의 공백을 메우고, 법이 다루지 못하는 부분을 손보는 데도 열심이다.
이는 마땅한 허위정보 대응 방법을 내놓지 못하는 한국에 시사점을 준다. 한국일보는 전문가 인터뷰를 토대로 허위정보를 막기 위한 유럽의 노력, 그 안에 담긴 고민과 교훈을 살펴봤다. EU 회원국에서 활동하는 연구원 등이 조직한 네트워크 유럽디지털미디어관측소(EDMO), 독일 싱크탱크 새로운책임재단(SNV)이 인터뷰에 응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발간한 미디어정책리포트도 참고했다.
"기본권 침해 안 된다" 공감 속 입법까지 한발 한발
유럽은 2010년대 중반 무렵 허위정보 규제 필요성을 절감했다. 2014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 2015년 중동 지역에서 대거 유입되기 시작한 난민, 2016년 영국의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 국민투표 등을 둘러싼 허위정보가 범람했던 탓이다.
개별 국가들은 허위정보 방지법을 앞다퉈 내놨다. 독일 '네트워크 집행법'(2017년 제정·형법상 위법인 콘텐츠를 신고 24시간 내 삭제), 프랑스 '정보조작 대처법'(2018년 제정·선거 3개월 전 허위정보 게시 금지) 등이 대표적이다.
EU도 움직였다. 허위정보는 국경 안에만 머무는 게 아니므로 역내 공통적으로 적용할 제도가 시급하다고 봤다. EU의 접근법은 '정보를 직접 차단·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가 유통되는 플랫폼을 통해 간접적으로 차단·제거하는 것'이었다. 독일·프랑스 등에 비하면 강도가 낮았지만 정보를 건드리는 것 자체가 표현의 자유를 훼손할 수 있기에 입법까진 고민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입법 전까지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일종의 '완충 장치'로 허위정보 실천강령을 도입했다. 2018년 마련된 실천강령은 플랫폼 기업의 자율적 참여를 전제로 한다. 여기엔 '가짜 계정 폐쇄 노력을 강화하겠다' '신뢰할 수 있는 정보에 대한 사용자 접근성을 높이겠다' 등 약속이 포함됐다. 페이스북, 엑스(X·당시 트위터) 등이 참여했다. EU는 플랫폼 기업의 강령 준수 여부를 주기적으로 평가하는 한편, 허점을 보완해 강령을 갱신하기도 했다.
이러한 '약속'은 2022년 11월 발효된 DSA의 기반이 됐다. DSA 도입에 따른 파장을 최소화하는 효과도 있었다. 파울라 고리 EDMO 사무총장은 "기본권을 해쳐선 안 된다는 인식에 기초해 자율적 규제부터 시작한 건 혁신적 접근이었다"고 말했다.
"플랫폼, 허위정보 유통 책임" '검열 논란' 우회
지난해 8월 시행된 DSA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적용 대상은 사용자가 4,500만 명(EU 인구의 약 10%) 이상인 거대 플랫폼 기업 22곳이다. 이들은 허위정보를 비롯한 각종 유해 정보를 차단·제거할 의무가 있다. 콘텐츠 확산을 미연에 방지할 조치도 개발해야 한다. 표현의 자유 침해를 최소화할 구제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
플랫폼 기업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DSA를 준수하지 않으면 전 세계 매출액 최대 6%를 과징금으로 물 수 있고, 최악의 경우 EU 시장에서 퇴출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DSA는 유럽의 가치를 디지털 세계로 가져오는 것"이라고 자평했다. 플랫폼 기업에 허위정보 방지 의무를 지우면서 검열 및 표현의 자유 침해 논란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다는 판단이 담긴 말이었다. SNV에서 플랫폼 규제 관련 프로젝트를 담당하는 율리안 야우쉬 디렉터는 "DSA는 가장 강력한 법은 아니지만 가장 진전된 법"이라고 평가했다.
EU가 지난달 도입한 'AI법'도 허위정보 대응을 염두에 뒀다. 'AI가 생성한 사진·영상 등에 AI가 만들었다는 표시를 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어, 영향력 있는 인사를 모사해 전파한 허위정보에 사람들이 속지 않도록 한다. 최근 독일에선 올라프 숄츠 총리가 "극우 정당인 '독일을위한대안(AfD)'을 금지하겠다"고 말하는 AI 제작 영상이 퍼져 논란이 된 바 있다.
"허위정보 대응=퍼즐 맞추기"… 팩트체크도 중심에
EU가 허위정보 대응의 '모범'으로 간주되는 건 '법의 존재' 때문만은 아니다. '허위정보 공급·유통부터 소비까지, 전체 단계에서 구멍을 메워야 한다'는 접근법이 본보기가 될 만해서다. 야우쉬 디렉터에 따르면 허위정보 대응이란 "퍼즐을 하나하나 맞추는 작업"인데, EU가 이를 비교적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 평가다.
거짓을 검증하고 사실을 확인하는 '팩트체크' 관련 기관·활동을 적극 지원하는 게 대표적이다. 'EU 대 허위정보(EU vs. disinfo)' 프로젝트가 자주 거론된다. EU 자금을 투입해 2015년부터 시작됐는데, 러시아발 허위정보를 주로 검증한다. 현재까지 1만7,000개에 가까운 허위정보가 수집·검증·반박됐다.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허위정보 유통 경로, 검증 과정도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 고리 사무총장은 "최근엔 기후위기,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6월 유럽의회 선거 등이 EU의 주요 화두"라고 했다.
신뢰도 있는 언론의 자유 보장도 EU가 허위정보에 대응하는 방법이다. EU는 지난달 국가 안보를 이유로 언론인 활동을 억압·감시하거나, 플랫폼이 언론사 콘텐츠를 임의 삭제하지 못하도록 한 '언론자유법'을 도입했다. 고리 사무총장은 "언론은 특히 정치인들이 쏟아내는 허위정보를 거르는 데 큰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대중이 허위정보를 걸러 내는 '눈'을 키우도록 하는 데에도 주력한다. EU는 EDMO 등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진행하는 다수 단체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야우쉬 디렉터는 "허위정보를 다루는 데 '쉬운 방법'은 없기에 국가별 상황·맥락에 맞는 틀을 꾸준히 갖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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