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 봅니다. 다수의 철학서를 펴내기도 한 진은영 시인과 20년 이상 출판 편집 기획자 생활을 거쳐 온 강창래 작가가 '한국일보'에 격주 글을 씁니다.
폴란드 시인 헤르베르트는 '생애'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여기 평범한 사람이 있다. 졸린 듯한 표정을 가졌던 소년, 모험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성실하지만 뛰어난 데도 없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엔 적당한 직장에 취직하고 아침에 일어나 전철을 타고 출근했다가 다시 전철을 타고 돌아오는 삶. 이룬 것도 많지 않다. 우표를 수집하고 체스 실력이 괜찮은 정도? 그는 “나는 사는 것이 아니라- 연명하고 있을 뿐”이며, 그래서 자신이 “벽 위의 그림자처럼” 느껴진다고 독백한다. “나는 언제나 창백했다 평범했다. 학교에서 군대에서/ 사무실에서 내 집에서 그리고 저녁 파티에서도.”라는 그의 말은 정확히 사실이다.
이 지독하게 평범한 삶에 대해 그는 한마디 더 덧붙인다. “어떻게 아내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의 모든 힘은 긴장하고 있었노라고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고 꼬임에 속지 않고/ 더 강한 자와는 어울리지 않기 위해서.” 그는 평범함을 유지하려고 애써왔다. 평범함은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유지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 우리가 그 상태를 지키기 위해 인생의 한순간도 교활하거나 타협하거나 아첨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런 순간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그는 우리 보통 사람들을 대표하여 발언한다. 그래서 그가 다음 사실을 궁금해할 때 우리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게 된다. “알 수 없는 건 피곤 불안 고통이 떠나지 않는다는 것/ 늘 그리고 지금도- 나 언제 쉴 권리가 있는지.”
평범한 사람들에게만 닥친다...현대 비극의 속성
하지만 보통 사람들의 불안과 고통이 이 정도의 탄식에 머무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세계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점점 더 가혹해진다. ‘평범한 사람들의 비극’이라는 말이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원래 고대 그리스에서 비극이란 탁월한 이들이나 고귀한 신분의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문학 장르였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후 사실을 깨닫고 제 눈을 스스로 찌른 오이디푸스는 왕이었다. 조국의 배신자로 낙인찍힌 오빠를 매장하지 말라는 국법을 거부하고 장례를 치르다 사형 선고를 받고 자살하는 안티고네는 공주였다. 그러나 이제 고위 계층의 사람들은 비극의 주인공을 자처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독한 죄를 짓지만 스위스 은행에 비자금을 은닉했다가 체포될 무렵에는 해외로 도피해 제2의 행복한 인생을 시작한다. 혹은 멀쩡하게도 고국에서 골프를 즐기며 통장 잔고 29만 원으로 평생을 호의호식하는 놀라운 마술을 부리기도 한다. 현대의 비극은 평범한 사람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칠레 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은 이 가혹한 진실을 소설과 연극으로, 시로 전하는 작가이다.
도르프만의 시집 '싼띠아고에서의 마지막 왈츠'는 민주적인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 아옌데가 군사 쿠데타로 살해된 후 칠레에서 일어난 비극을 이야기한다. 소아과 의사였던 아옌데는 의료봉사를 하면서 가난한 칠레인들의 비참한 현실을 목격하고 정치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어린이들에게 무상급식을 실행하고 독점기업을 국유화하는 정책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의 개혁적 노선을 싫어했던 미국의 설계에 따라 칠레 군부의 희생양이 되었다. 미국을 등에 업고 정권을 장악한 장군 피노체트는 수천 명을 잡아다 소리 소문 없이 죽이고 암매장했기 때문에 가족들은 잡혀간 이의 생사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다.
'희망'이라는 시에는 당시의 정황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시에서 한 아버지는 5월 8일 이후 행방불명된 아들의 생사를 알고 싶어 한다. 군부는 서너 시간 의례적인 조사를 하겠다고 아이를 데려갔다. 다섯 달 지난 뒤, 누군가 피노체트의 비밀경찰들이 고문 장소로 사용하는 비야 그리말디에서 아들이 지르는 비명과 목소리를 들었다고 전한다. 그 소식을 듣고 아버지는 말한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이거다./ 놈들이/ 그놈들이 아직도/ 제 자식을/ 고문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게/ 어떻게 해서/ 한 아비의/ 기쁨이자/ 한 어미의/ 기쁨이/ 되는지 말이다./ 그건/ 그 애가 잡혀간 지 다섯 달 될 때까지는/ 아직 살아 있었다는 뜻이고,/ 우리의 최대/ 희망은/ 놈들이 그 애를 고문하고 있다는 소식을/ 내년에/ 듣게 되는 것이다./ 여덟 달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어떻게 해서 부모가 자식이 어디선가 비명을 지르고 있기를 바라게 되는가. 그 모든 고통을 견디고서라도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부모의 마음속에 참혹한 희망을 심어 놓았다.
부모는 아들과 딸을 기다리고 아내는 남편을 기다린다. '그 앤 이제 젖니를 거의 다 갈았어요'에서는 어린아이가 사진 속을 가리키며 옆집 아저씨와 같이 있는 남자가 누구냐고 묻는다. 엄마는 ‘아빠’라고 답한다. 아이는 아빠가 왜 한 번도 자기를 보러 안 오는지를 궁금해하지만 엄마는 아빠의 죽음을 전할 수가 없다.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것은 아이들은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미국의 심리치료사 메리 파이퍼는 다섯 살짜리 쌍둥이 아이들이 엄마로부터 아빠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뒤 했던 반응을 전한다. 아이들은 천진한 눈망울로 엄마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내일은 집에 오시는 거죠, 그렇죠?” 그러나 도르프만의 시에 등장하는 엄마가 아빠는 죽었다고 말하지 못하는 데는 조금 다른 이유가 있다. 그녀도 남편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애한테 아빠가/ 살아 있다고 말해도/ 거짓이고/ 그 애한테 아빠가/ 죽었다고 말해도/ 거짓말이다.” 그래서 엄마는 아이에게 유일하게 해줄 수 있는 말을 되풀이한다. “아빠는 집에 한 번도 오시지 않아./ 오실 수가 없어서 그렇단다.”
더 강한 자와 어울리지 않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하다
사랑하는 이들을 상실하는 사건은 어떤 식으로 일어나든 견디기 힘든 고통을 준다. 그렇지만 남겨진 이들의 이러한 고통 위로 또 다른 고통이 더해지는 경우가 있다고 시인 헤더 크리스털은 말한다. “누군가가 바다에서 실종됐을 때, 남은 이들이 느끼는 특별하게 잔인한 감정은 언제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오늘인가? 한참 전일까? 안갯속이다('더 크라잉 북').” 바다 한가운데에서 사라진 사람들처럼 생사의 정확한 증거조차 찾을 수 없는 실종자들이 수천 명 생겨난 나라. 이런 땅에서 애도는 시작될 수조차 없었다. 그것이 도르프만의 시집에서 통곡이 터져 나오지 않는 이유이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확실하지도 않은데 그를 위해 울부짖는다는 것은 불길한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애타는 얼굴로 전단지를 들고 관공서와 거리를 헤매며 법원에 탄원서를 넣고 외국 기자들에게 하소연하다 돌아오는 길모퉁이에서 숨죽여 흐느낀다.
도르프만은 이 고요한 고통을 외면하는 삶을 살 수도 있었다.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났고 대학교수 아버지를 따라 두 살에 뉴욕으로 갔다. 열두 살 무렵엔 다시 칠레로 이주했지만 이후로도 영어를 사용하는 국제학교에 다니며 자신을 미국 청년이라고 생각하는 특권적 삶을 살았다. 그러나 대학 시절 이후부터 칠레의 현실을 바꾸는 일에 참여하게 되면서 칠레인의 고통을 자신의 몫으로 여기게 된다. 그는 모국어처럼 느껴지는 영어로 라틴 아메리카인들의 비극에 대해 쓴다. “놈들은 내 아들을 옆방에서 고문하고 있었소./ (......) 놈들이 우리 여성 동지의 몸속에 쥐를 집어넣었단 말이오. 정말이오('첫 번째 서시: 동시통역').” 그는 누군가의 실재하는 고통을 멜로드라마로 각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정확히 동시통역하는 것이 시의 임무라 믿는다. 시인은 자신을 영어와 스페인어라는 두 명의 어머니, 두 개의 근원을 가진 언어적 존재로 느끼며 적대적 어머니들 사이에서 괴로워했다. 그러나 항상 그는 약자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강한 어머니의 아이로 남지 않기를 선택한다. 그것은 그의 고백대로, 세상의 고통에 대해 고작 “전문가란 이유로/ 두둑이 보수 받고 동시통역이나 해주는(앞의 시)” 단순한 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저 더 강한 자와 어울리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모든 힘을 긴장시키는 한 사람 덕분에 평범한 이들의 비극이 온 세상에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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