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재의 식사(食史)]<73> 주막의 역사
편집자주
※이용재 음식평론가가 흥미진진한 역사 속 식사 이야기를 통해 ‘식’의 역사(食史)를 새로 씁니다.
추운 한겨울, 한국 사람이라면 자연스레 국밥 한 뚝배기를 떠올린다. 뜨뜻한 국물과 밥의 조화에 본능적으로 끌리는 것이다. 그렇게 국밥을 떠올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주막도 상기하게 된다. 굳이 사극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게는 '국밥=주막'이라는 등식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각인되어 있다. 국밥에 모주, 설설 끓어 등과 허리를 지질 수 있는 아랫목까지… 낭만화된 주막의 정형을 우리는 품고 산다.
주막의 유래와 관련한 설은 분분하다. 멀리 보는 이들은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김유신이 어릴 때 드나들었다던 경주 천관의 술집이 효시라고 본다. 한편 현실적인 시각을 가진 이들은 조선 후기, 즉 18세기를 주막의 전성시대라고 이야기한다. 대동법이 시행되고 상품 경제가 발달해 화폐 유통량이 늘면서 술과 밥, 더 나아가 숙박까지 돈과 교환할 수 있는 주막이 본격적으로 생겨나고 자리를 잡았다는 주장이다. 그렇기에 조선 이전을 그린 사극에서 등장하는 주막은 설정 오류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한다.
교통 요지에 차린 엉성한 초가집
주막은 명칭에 정체성이 숨어 있다. '술 주(酒)'에 '장막 막(幕)'이니 '술을 파는 임시 가건물'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막'이 말해주듯 주막은 체계적인 요식 혹은 숙박업소라고 말하기 어렵다. 주로 교통의 요지에 민간이 생계를 위해 차렸기에 엉성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 신윤복이 꽤 아름답게 그려내기는 했지만, 주막 건물은 초가집이었다. 게다가 술과 밥을 먹으면 숙박은 공짜였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주막의 소박함을 이해하기가 쉽다. 그렇기에 주막이 무허가 불법 업소였다는 주장도 있다.
불법이든 합법이든, 주막에서는 어떤 음식을 냈을까. 일단 술은 '막 거른' 막걸리가 주였고 진국, 즉 오래 고아 걸쭉한 국물을 내놓았다. 술 한 사발에 공짜 안주 한 점이 붙었는데 마른안주로는 육포나 어포, 진안주로는 삶은 돼지고기나 너비아니, 떡산적, 생선구이 등이 있었다. 주막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는 장국밥이 있었다. 양지머리로 맑은 국물을 내고 간장으로 간을 맞추는데, 영남지방에서는 육개장을 내놓기도 했다.
한편 해장국(술국)을 내는 주막도 있었다. 살점을 발라낸 소뼈를 도끼로 토막 쳐 물에 넣고 끓이다가 된장을 풀어 간을 맞추고 배추 우거지나 선지를 넣고 푹 끓여 만든다. 신윤복의 '주사거배'에 술국을 먹으러 온 한량들과 해장국이 끓고 있는 솥 앞에 앉아 국자로 국을 뜨고 있는 주모의 모습이 담겨 있다. 술안주로는 삶은 양지나 쇠머리편육은 물론 혀나 간, 쇠꼬리 등을 먹었다.
"산간벽지 없는 곳 없는 소자본 사업"
당시 외국인이 남겨 놓은 주막과 음식에 대한 기록도 재미있다. 1894년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1831~1904)이 조선을 여행하며 남긴 기록에 의하면 대부분의 주막에서 밥과 계란, 채소와 국, 한국식 버미첼리(세면), 말린 미역 요리 등을 사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밀가루와 설탕과 기름으로 만든 한국식 패스트푸드', 즉 약과 또한 선택할 수 있었다. 비숍은 ‘차를 마실 수 없었고 우물은 의심스러워 끓인 물을 마셨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카레를 요리해 먹었기에 원래 음식을 사먹으면 무료인 숙박비를 실비로 냈다.
1909년 12월, 당시 조선통감부 경시로 재직하던 일본인 경찰 이마무라 도모(1870~1943)의 기록도 남아 있다. 도회지의 경우 주막이 음식 전문이지만 시골에서는 여인숙을 겸하기도 하며, 전국 산간벽지 없는 곳이 없다는 내용이다. 계급을 막론하고 출입 가능하며 술과 음식을 제공하는데, 탁주에 밥과 국과 반찬, 고기 등을 먹을 수 있다. 밥값은 3, 4전부터 20전까지도 올라가는 가운데 기름칠을 한 목침 1점 외의 침구는 제공하지 않는다. 술값과 음식값만 받으며 소자본으로 이익을 내는 사업이라 소개했다.
돈을 받지 않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 숙박 업소로서 주막은 궁여지책이었다. 의사이자 선교사인 릴리어스 언더우드(1851~1921)는 "잠을 좀 자려면 꿀꿀, 꽥꽥, 꼬꼬댁, 푸푸, 멍멍 소리가 뒤범벅된 소리를 들으며 잘 각오를 해야 하니 잠은커녕 도무지 편안히 쉴 수조차 없었다. 대부분의 주막에는 안방이 오직 하나뿐이고 그곳만이 여자가 머물기에 적당했다. 조수와 가마꾼들, 마부들, 다른 여행자들은 사랑방에 들었는데, 꼭 통 속에 빽빽이 들어찬 것 같았다고 한다"고 기록을 남겼다.
조선시대에 주막을 비롯한 숙박 시설이 열악했던 원인이 양반이라는 해석이 있다. 조선시대 양반의 가계부에 의하면 손님 접대에 전체 수입의 3분의 1을 썼다. 친분 있는 이들은 물론 나그네들을 먹이고 재우는 데 썼다는 의미다. 당시 나그네들이 지나가는 고을의 유력한 집안에 청하면 숙식 제공은 물론 노잣돈까지 쥐여주곤 했었다. 얼핏 보면 양반의 관대함 및 인심을 과시하는 수단인 것만 같지만, 교통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대에 나그네들로부터 정보를 취하려는 시도였다.
교통수단 개편에 영향력 잃어
주막은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초기에 쇠락의 길을 걷는다. 원인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일단 주막에 사람들을 모으는 원동력이었던 교통수단의 대폭적인 개편을 들 수 있다. 신작로가 뚫리고 자동차가 다니기 시작하는 한편 철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장거리 교통 체계가 완전히 변했다. 일부 주모들은 측량사나 자동차 운전기사들에게 뇌물을 주면서까지 자신들 주막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철도의 역할에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일제의 주세법이 있다. 일본은 전쟁 자금 확보를 위해 1909년 주세법을 발효시키고 1916년 강화된 주세령을 시행했다. 제조와 판매를 분리하고 두 과정 모두에 세금을 부여했으니 가양주(家釀酒), 즉 각 가정에서 빚어 마시던 술이 하루아침에 무허가 주류로 전락했다. 주막에서 내는 술도 결국 가양주였으니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1910년대 20만 곳에 달했었던 주막은 양조장이 생겨나면서 서서히 대체되었고, 일제의 단속과 폐업으로 1930년대 말에는 5,000곳 이하로 줄어들었다.
이처럼 서서히 사라져 가기는 했지만 철도가 다니지 않는 지역에서는 주막이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도 존재했던 가운데, 최후의 주막은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의 삼강주막이었다. 이름 '삼강'처럼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이 합류하는 강나루에 1900년경 등장한 삼강주막은 1934년 경술홍수 때 무너져 방 2칸, 부엌 1칸, 청마루 1칸에 15평짜리 건물로 다시 지어졌다.
대한민국 최후 주막은 '삼강주막'
삼강주막의 마지막 주모는 유옥련이었다. 1917년생인 그는 1932년 네 살 위 남편과 혼인하고 1936년 삼강주막의 영업을 이어받았다. 삼강주막은 일제 말기까지 소금배 상인과 보부상이 주요 고객이었고, 소금배가 끊긴 뒤에는 강을 건너 읍내와 서울, 대구 등으로 가려는 주민과 과객들로 붐볐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벌어지면서 다리가 놓이고 제방이 생기면서 인적이 끊어졌다. 새마을운동 당시 슬레이트 지붕으로 개보수된 집을 이후 황토벽의 초가집으로 재건축해 오늘날 관광지 노릇을 하고 있다.
삼강주막이 사라지면서 주막의 맥은 끊겼다. 한편 조선 말기부터 음식점과 주점은 점차 분화되기 시작했다. 막걸리를 걸러 낸 술지게미를 다시 우려낸 모주와 비지찌개를 파는 노상주점, 생활이 궁핍한 여염집 아낙네나 과수댁이 손님과 직접 얼굴을 대하지 않고 술상만 내어 주는 내외주점, 목로(널빤지로 좁고 기다랗게 만든 상)에 안주를 늘어놓고 술을 파는 목로주점, 선 채로 술을 마시고 안주를 집어 먹는 선술집 등이 생겨났다.
이처럼 주점과 음식점은 물론 숙박업소까지 철저하게 분화되었기에 이제 주막을 경험하기란 불가능해졌다. 그런 가운데 찜질방이 주막의 후예라 보는 시각이 있다. 바닥 난방에 오직 베개만 내어주며 숙박비보다 시켜 먹는 음식값이 수입원이라는 점, 투숙객이 전부 같은 공간에서 잔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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