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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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음악가' 제도는 한 연주자의 음악 세계를 여러 무대로 집중 조명하면서 연주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 정체성을 뚜렷이 드러낼 수 있는 시스템이다. 올해 금호아트홀의 상주 음악가로 선정된 피아니스트 김준형은 직접 기획한 공연 시리즈에 '엽편소설'이란 독특한 제목을 붙였다. 처음엔 엽기적 음악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는지 멋대로 상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여기서 '엽'은 나뭇잎을 의미했다. 나뭇잎 위에 적을 만큼 짤막하지만 인생의 중요 순간을 포착해 상상력을 발휘하는 소설이란 뜻이었다. 제목부터 자신의 음악 세계를 뚜렷이 드러내니 인상적이었다. 상주 음악가로서 1년 동안 네 번에 걸쳐 무대에서 펼쳐질 엽편소설, 그 첫 챕터가 지난 11일 금호아트홀 신년 음악회로 막을 열었다.
누군가는 남다른 해석을 들려주고, 누군가는 출중한 기교를 들려준다. 김준형의 연주에선 음색부터 들려왔다. 첨엔 '진한' 줄 알았다. 그런데 그 표현만으론 불경했다. 받침을 바꿔 '짙은'이라 해야 옳았다. 김준형의 음색은 거대한 붓으로 짙은 먹물을 풍성히 머금어 그리는 수묵화를 떠올리게 했다. 붓의 크기와 농축된 밀도가 확연히 달랐다. 그렇다고 마냥 시커먼 것은 아니었다. 첫 곡으로 연주한 바흐의 프랑스 모음곡 4번에선 두 손으로 연주하는데도 대여섯 개의 레이어가 각기 농담을 달리해 생생하게 들렸다. 의도하는 바가 깊고도 짙은 음색으로 구현되니, 가볍고 옅은 경과구에서도 청중으로서 길을 잃지 않았다.
짙은 음색을 구현하려는 대개의 피아니스트들은 안간힘을 써 소리의 몸집을 부풀리곤 한다. 그런데 김준형은 독특했다. 표정이나 동작에 힘의 과용이 느껴지지 않았다. 김준형의 평정한 표정은 몰입을 과시하며 얼굴로 피아노를 치는 숱한 피아니스트를 되돌아보게 했다. 발산과 수렴이 절묘한 균형을 이룬 베토벤 소나타 22번에 빠져들며 생각했다. 비울수록 거대해지는 이치를 저 청년은 어떻게 터득한 것일까. 마지막 곡으로 연주한 브람스 소나타 3번에선 수양의 시간이 아니었으면 이르지 못할 정신의 세계가 들리는 듯했다.
누군가는 작곡가가 어떤 사람인지 들려주고 누군가는 그 시대 음악의 진화를 들려준다. 김준형에게선 짙은 음색과 수양의 시간이 들려왔다. 그의 짙은 수양이 얄팍한 요령이나 말초적 자극에 현혹되지 않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독주회로 시작된 김준형의 엽편소설은 세 달 후엔 피아노 2중주 실내악으로 진화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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