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룰 수 없는 숙제, 상속세 개편]
<상> 먼저 나선 선진국
일본, '폐업시대' 승부수, 상속세 손질
중소기업 상속·증여세 무한 유예
세 부담 완화, 기업 세대 교체 기여
기업도 순기능 인정 "경쟁력 확보"
'중소기업 사주 연령 평균 71.6세, 연간 폐업 중소기업 4만9,625개(2022년 기준), 상속세 최고세율 55%.'
가업을 잇는 기업 문화로 장수기업이 즐비한 일본 중소기업을 둘러싼 현재 환경이다. 60대에 접어든 경영주가 최고세율 50%인 상속세 부담에 회사를 자녀에게 물려주는 대신 폐업·매각하려는 한국과 똑 닮았다. 다른 점은 한국에 비해 한발 앞선 일본의 대처다.
일본은 중소기업 세대 교체를 막는 주원인인 상속세 부담을 2009년, 2018년 두 차례에 걸쳐 낮췄다. 가업 승계 중소기업을 향한 일본의 상속세 개편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한국에 시사점을 던진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운을 띄운 상속세 완화를 두고도 '낡은 상속세를 없애자', '폐지는 곧 부자 감세' 등 강경한 찬반 입장만 부딪히는 한국이 따를 법한 '절충점'으로서다. 한국일보가 사회적 갈등은 줄이면서 기업 경쟁력을 높이는 상속세 개편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일본을 찾은 이유다.
지난달 19, 20일 일본 도쿄에서 만난 가업 승계 기업의 공통점은 젊음이었다. 도쿄 메구로구에 위치한 금속부품업체 사토제작소. 사토 슈야(37)는 3대 대표인 아버지 사토 다카유키 밑에서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다. 그의 인생이 바뀐 건 10년 전. 사토제작소 2대 대표였던 할아버지 사토 슈우지가 숨을 거두자 잘 다니던 정보기술(IT) 회사를 관뒀다. 그리고 가족이 일군 사토제작소로 들어왔다.
"어릴 적부터 회사를 이어야 한다고 했던 할아버지 말씀이 운명 같았다." 사토의 회상이다. 사토제작소는 사토의 증조할아버지가 1950년 세운 회사다. 방송기기, 의료기기, 위성통신 등에 들어가는 금속부품이 주력 상품이다. 일본 공영방송사 NHK, 최대 통신사 NTT 등에 제품을 납품하는 연 매출 2억 엔(약 18억 원)의 기업으로 안착했다.
'제2의 창업' 일구는 가업 후계자
그는 아버지뻘인 50, 60대 베테랑 직원들로 가득했던 회사에서 인정받기 위해 5년을 주말 없이 일했다. 회사 일이 손에 익자 '차기 대표'로서 변화를 줬다. 일이 거칠고 고되다는 겉모습에 금속부품 제조업 취업을 꺼리던 청년 채용에 공을 들였다. 또 여태 없었던 젊은 여성도 적극 뽑았다. 그 결과 현재 직원 17명 중 9명이 20대, 7명이 여성이다.
직원 연령대가 낮아지고 성별도 다양해진 사토제작소는 금속부품 제작에 머무르지 않았다. 사토를 비롯한 젊은 직원은 꽃병, 자전거 등 금속 공예 작품을 만들고 지역 어린이를 대상으로 금속부품 만들기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토는 이 모든 과정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등 아버지와 달리 회사 홍보에도 적극적이다.
도쿄 오타구에 있는 중소기업 무소공업도 비슷하다. 무소공업 대표 오하리 데츠지(42)가 20대에 꿈꿨던 일은 피아노 조율사였다. 하지만 결혼을 앞두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아버지 오하리 데루오가 이끌던 무소공업에 2010년 취직했다.
오하리의 할아버지가 1963년 창립한 무소공업은 자동차 등 각종 기업·대학 연구소에 실험 장치·부품을 납품한다. 그의 아버지가 무소공업에 자리 잡은 1970년대 후반부터 사세를 키워 현재 직원 10명, 연 매출 1억2,000만 엔을 거두고 있다.
주변에서 10년은 일해야 회사를 경영할 수 있다고 조언했지만 오하리는 입사 7년 만인 2017년 3대 대표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의 무소공업이 시대에 뒤처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부품 제작에 빠삭한 60대 직원의 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젊은 직원이 필요하다는 오하리의 의견을 아버지가 비용 문제로 반대한 게 계기였다.
그가 대표를 맡은 후 강조한 건 청년 채용, 디지털화였다. 업무 방식은 이전보다 민주적으로 바꿨다. 오하리는 "아버지가 대표일 때 직원들이 시키는 일만 했는데 지금은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고 있다"고 자평했다. 이런 사내 분위기가 형성되자 주문 물량 생산에 집중하던 무소공업은 거래처에 먼저 아이디어도 제안하는 능동적인 기업으로 변화했다.
이처럼 사토제작소의 사토, 무소공업의 오하리는 부모 세대와 같은 일을 하며 회사 명맥을 이어나가는 동시에 변화하는 회사를 만들고 있다. 가업 승계가 '제2의 창업'으로 불리는 이유를 보여주는 사례다.
폐업 부추긴 '무거운 상속세' 개편
두 사람에게 걱정이 있다면 상속세다. 모두 아버지가 살아 있어 상속세를 낼 단계는 아직 아니나 앞으로 회사를 경영하면서 부담이라는 게 공통된 생각이다. 전체 중소기업계로 넓혀도 비슷하다. 중소기업 폐업 원인은 상품 경쟁력 저하, 후계자 부재 등 기업 내적인 요인에 더해 상속세 부담도 무시할 수 없다.
높은 최고세율 등 한국보다 무거운 상속세를 운영하고 있는 일본 정부는 이런 중소기업의 우려를 받아들였다. 2009년 사업 승계 '일반조치'에 이어 2018년 '특례조치'를 도입한 배경이다. 일반조치에 따라 가업을 승계한 후계자는 상속세, 증여세의 3분의 2를 유예받았다.
특례조치는 일반조치보다 더 강력한 세제 완화책으로 상속세, 증여세 전액을 원하는 때에 낼 수 있는 제도다. 세금 총액은 상속, 증여일에 발생한 금액이다. 예컨대 상속, 증여일로부터 20년 후에 납세하더라도 20년 전 부과된 만큼만 세금을 낸다. 물가 상승률, 이자 등을 반영하지 않는 구조다.
가업 승계자로선 이익이 충분히 발생한 다음 세금을 납부할 길이 열렸다. 승계 직후 상속세 납부 목적의 목돈을 마련하기 위해 대출, 주식 매각 등 출혈을 감수하지 않게 됐다. 사토제작소, 무소공업도 특례조치를 활용하면 상속세 부담을 크게 낮출 수 있는 셈이다.
또 중소기업 승계자는 상속세, 증여세 납부 목적으로 저리의 정책금융도 활용할 수 있다. 사토, 오하리 모두 상속세가 부담이긴 하나 "세금을 천천히 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가장 필요하다"며 특례조치에 대해 긍정 평가했다.
특례조치는 한국보다 먼저 '중소기업 폐업 시대'가 열린 일본에서 가업 승계를 통해 강소기업 생존에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다. 당장 내야 할 세 부담이 사라진 만큼 가업 승계를 결정한 후계자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시자와 요시카와 일본 중소기업청 재무과장 보좌는 "특례조치를 신청·적용한 중소기업은 누적 1만6,000개 정도로 일반조치 때와 비교해 제도 활용도가 더 높아졌다"며 "특히 납세 여력, 고용 창출 능력 등이 있는 흑자 기업 중심으로 혜택을 보고 있는 게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일본보다 느리고 약한 한국의 대처
한국의 제도는 어떨까. 한국도 일본처럼 가업 상속 중소기업이 세금을 분납할 수 있는 연부연납이 있다. 상속 5년 내에 납부를 완료해야 했던 상속세 연부연납 기간은 2022년 10년, 2023년 20년으로 늘었다. 증여세 연부연납은 기존 5년에서 올해부터 15년으로 확대했다. 하지만 최근에야 세금을 나눠 내는 기한이 넓어져 일본보다 대응 속도(일반조치 기준)가 10년 넘게 느리고 기간 자체도 무기한 유예에 못 미친다.
상속세 납부 방식도 양국이 다르다. 한국은 상속가액 전체를 토대로 상속세를 매기고 이를 상속인별로 나누는 '유산세 방식'이다. 이에 비해 일본이 일찌감치 도입한 '유산취득세'는 상속인별로 상속받은 재산에 상속세를 부과한다. 상속인이 물려받은 재산 규모에 따라 다른 세율을 적용받는 만큼 상속 재산 총액 기준으로 세율을 정하는 유산세보다 세 부담이 적다.
유산취득세는 상속세를 운영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4개국 중 20개국이 채택하는 등 유산세(4개국)보다 합리적인 과세 체계로 평가받는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이후 유산취득세로의 전환 등 상속세 개편을 모색하고 있지만 아직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상속세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분위기가 한국보다 먼저 형성돼 관련 정책을 앞서 도입한 일본에도 상속세를 아예 없애야 한다는 여론이 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상속세 폐지에는 신중한 입장이다.
이시자와 재무과장 보좌는 "상속세를 아예 면제하면 특혜가 될 수 있다"며 "특례조치를 세금 남부 능력이 충분한 대기업으로 확장하는 것 역시 어렵다"고 말했다. 세 부담 완화 대상을 중소기업으로 좁히되 그 혜택은 키우는 게 현실적인 상속세 모델이라는 뜻이다.
세금이 버거운 기업 쪽에서 제시하는 상속세의 순기능도 눈에 띄었다. 사토는 "상속세가 있으면 승계 과정에서 실력 있고 새 시대에 적응하는 기업만 추려지게 된다"며 "도태하는 기업이 세제 혜택으로 계속 살아 있다면 국가 경제에도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말했다. 상속세를 폐지하거나 크게 완화하는 것만이 기업 경쟁력을 확보하는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말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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