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서경식 '나의 미국 인문 기행'
"이제 내 나이를 생각하면 앞으로 미국을 여행할 기회는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먼 옛날 기억의 단편도 되살아났다. 좋은 기억만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나라는 인간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는, 그런 절실한 기억이다. 그 기억들은 내 속에 있는 '선한 아메리카'의 기억과도 연결된다."
-서경식, '나의 미국 인문 기행' 중에서
기행문은 여행지 소개와 에세이 중간쯤에 있다. 장소에 대한 정보와 작가의 개인적 단상을 아우른다는 점이 이 장르의 매력이다. '나의 서양 미술 순례'로 이름을 알린 고(故) 서경식 일본 도쿄경제대학 교수의 유명한 인문 기행 시리즈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 생전 그가 미국을 '인문'이라는 테마로 여행하며 기록한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은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 '나의 영국 인문 기행'의 계보를 잇는 마지막 기행서다.
저자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기 직전인 2016년, 학생운동을 하다가 수감된 두 형(서승과 서준식)의 구명활동을 위해 미국을 오가던 1980년대, 코로나19 팬데믹이 덮친 2020년이라는 세 시간대의 미국을 오가며 인문·예술 작품을 만난다. 자본주의의 대명사 미국에서 사회주의자로서 대중에게 다가간 디에고 리베라, 참혹한 현실을 담은 그림을 저항과 연대의 무기로 삼았던 벤 샨, 미국의 국가폭력과 감시를 문제 삼아 도발적 영상을 선보인 로라 포이트러스 등 미국에서 고투한 예술가와 그 작품에 얽힌 사유를 풀어낸다.
전작들이 인문주의의 의미, 식민주의와 제국주의 역사에 대한 통찰을 담았다면 이번에는 전작의 주제에 더해 자유의 기치를 내건 시대의 암울한 현실에 대한 사유로 한 걸음 이동했다. 특히 예술 작품을 '부정의에 맞서고 선의를 나눌 줄 아는 인간임을 깨닫게 하는 방법이자 저항의 목소리'로 읽어낸 기록은 평생 날카로운 사유를 벼린 지식인의 고백으로도, '재일조선인'이란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낸 작가의 에세이로도 의미 있는 궤적을 남겼다.
"우리는 앞으로 긴 악몽의 시대를 살아가게 될 것이다"라는 고인의 예견대로 달라진 세계에 대한 단상과 함께 재난, 전쟁, 국가 폭력의 현실 속 도덕의 거처를 묻는 맺음말은 책의 백미다. 저자의 유고가 된 맺음말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전혀 나아지지 않는 세계 여기저기서 하루하루 현실에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내 경험의 작은 조각이라도 제시해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인간 그 자체에 절망하지 않기 위해. 그것이 나의 끝나지 않는 '인문 기행'의 한 페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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