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참군인 리더십에 빠진 청년들]
영화 '서울의 봄' 이태신· '노량~' 이순신·드라마 '고려거란전쟁' 양규
SNS 명패 바꾸고 글 쏟아내... 10~30대 주축 새 아이돌로
리더십 환호 이유 ①초위험사회 생존 불안 ②직업적 소명 의식 집단적 열망 ③공동체성 회복 의지
"저출산, 국가 운명 관심 없다고? 기성세대 오해"
#1. 정민주(34)씨는 서울 종로구에 있는 직장 인근 서점에 들러 18일 소설책 '고려거란전쟁'을 샀다. 고려의 잊힌 영웅인 양규 장군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책은 방송 중인 KBS 사극 '고려거란전쟁'의 원작이다. 정씨는 "임금이 남쪽으로 피란할 정도로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서 양규가 고려인 포로를 한 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모습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며 "그 우직함과 책임감에 회사의 부속품처럼 일했던 내 직장 생활을 돌아보게 되고 양규를 더 알고 싶어 책을 샀다"고 말했다. 드라마에서 양규가 전사한 날(7일), 그의 이름은 구글 트렌드 검색어 1위로 깜짝 등장했다.
#2. 대학생 김승희(23)씨의 카카오톡 프로필 상태 메시지엔 '이태신 사진'이 걸려 있다. 이태신은 영화 '서울의 봄'에서 12·12 군사반란에 끝까지 저항하는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실존 인물은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이다. 정우성이 연기했다. 김씨는 "이태신을 보면서 그동안 어쩔 수 없다며 모른척해 온 것들이 그것을 용인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좀 더 내 삶에서 목소리를 내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CGV에 따르면 26일 기준 '서울의 봄' 관객 절반 이상(52.3%)이 2030세대였다. 이 영화는 1,200만 명이 넘게 봤다.
K팝 스타 아닌 '참군인' 새 아이돌로
장태완, 양규, 이순신(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지난 연말 이후 극장과 안방극장을 뜨겁게 달구고 사회 곳곳에서 재조명된 인물들이다. 공통점은 모두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참군인'이라는 것. 그 인기를 주도하는 건 10~30대다. 청년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프로필 사진을 이태신 등의 사진으로 줄줄이 바꿔 달았고, 참군인들의 이름을 해시태그로 단 일상의 글을 온라인에 쏟아낸다. 영화 속 이태신의 자수로 새긴 군복 명찰을 직접 제작해 공유하거나, "서울 낙성대 공원의 강감찬 장군 동상 옆에 양규 장군 동상을 세워 달라"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한다. K팝 스타가 아닌 '엄근진'(엄격+근엄+진지)한 참군인이 요즘 청년 세대의 새로운 아이돌로 떠오른 것이다.
계급 높은 군인들을 향한 대중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사리사욕에 눈멀어 사명을 저버린 '정치군인'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며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역사적 상처가 사회 곳곳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청년들이 군인을 적극 소비하는 현상은 이례적이다.
"초위험·불확실성 사회, 버티고 지키는 게 화두"
핵가족도 아닌 '핵개인'의 시대, 청년들의 참군인 재조명은 ①생존 불안이 커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장태완, 양규, 이순신은 칭기즈칸처럼 정복 전쟁으로 영토를 넓혀 추앙받는 군인이 아니다. 자기 자리를 지킴으로써 나라를 지키려 한 영웅들이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이태원 핼러윈 참사 등을 경험한 청년들은 '초위험사회'를 직면했다. 좁은 취업 문, 높은 집값으로 생존 위기가 닥친 데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 시스템은 안전을 위협한다. 목숨이 달린 기후위기를 정부가 돌파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사회적 불확실성에 치인 요즘 청년 세대는 (미래를 보고) 자기 계발을 하기보다 버티고 지키는 것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며 "그래서 지키는 영웅, 참군인에 환호하는 것"이라고 봤다. 불길에 뛰어들어 타인의 생명을 지키는 소방관들이 새삼 청년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또한 ②직업적 소명 의식에 대한 청년 세대의 집단적 갈증으로도 해석된다. 김성윤 동아대 융합지식과사회연구소 전임연구원은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본분을 다했더라면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 같은 재난을 최소화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트라우마가 청년들에게 각인돼 있다"며 "힘 있는 사람들이 '트롤짓(온라인 게임에서 팀원에 민폐를 끼치는 행위)'만 안 하면 그럭저럭 '정상 사회'가 될 것이란 기대 속에 직업적 소명에 대한 문제의식이 참군인 열풍에 투영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소방관 열풍과 참군인 신드롬... 청년들의 결속
참군인 열풍은 정치인, 관료 등 공인들에 대한 청년들의 불신이 그만큼 치솟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지난해 우리 사회를 상징하는 사자성어는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잊는다는 뜻의 '견리망의'(見利忘義)였다"면서 "'공무를 담당하는 이들이 사익보다 공익을 앞세우는 정의로운 이들인가'라는 짙은 회의감이 영화·드라마 속 참군인에 대한 열망을 키운 것"이라고 말했다.
참군인 인기는 청년들의 ③공동체성 회복에 대한 의지로도 읽힌다. 윤김지영 창원대 철학과 교수는 "파편화된 청년 세대는 참군인을 적극 소비하면서 결속한다"며 "국가와 민족이라는 보편적 가치의 중요성을 공유하는 것이 (역사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은 그들에게) 유의미한 경험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기성세대가 아닌 청년들의 입에서 "이태신을 보면서 늘 어떤 문제가 생기면 뒤로 숨는 내가 부끄러웠고 정의로운 선택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이찬희·16) "왜군을 섬멸해야 한다며 명나라 장군과 대립해 타협하지 않고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을 보고 헌신과 직업적 사명감을 돌아보게 됐다"(이윤형·24) 같은 목소리가 나온 배경이다.
한국은 출산율 세계 꼴찌를 다투는 초저출생(지난해 기준 합계출산율 0.7명) 국가다. 사회 재생산에 시큰둥한 청년 세대는 국가의 운명엔 큰 관심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지만, 참군인 열풍은 그와 정반대의 양상이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청년들이 공동체적 가치에 무관심하다는 건 기성세대의 오해"라며 "그들이 공정을 중시하는 건 생존을 위해선 공동체적 가치가 중요하다고 체감했기 때문이고, 그런 가치관이 연예인을 향한 강력한 도덕주의나 정의로 투사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챗GPT시대, 대체불가능 화두된 몸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한 참군인 소비는 몸으로 직접 보여주는 리더십에 대한 환호로도 이어진다. "김헌식 카이스트 미래세대행복위원회 위원은 "인공지능(AI)시대에 아이디어가 쉬 대체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면서 직접 몸으로 이뤄낸 결과들에 사람들이 진정성을 부여하기 시작했다"며 "외국어 공부 같은 자기 계발보다 청년들이 체력 관리에 더 매달리는 흐름이 참군인 열풍과 닿아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한국 예능 콘텐츠 중 전 세계 구독자가 가장 많이 본 프로그램은 연애 장르가 아닌 '몸'으로 끝까지 살아남는 과정을 그린 '피지컬100'(2023년 1~6월 집계 기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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