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감으로 버텨온 이공계 연구 인력들
R&D 예산 삭감이 뒤흔든 연구 생태계
혁신 뒷받침 발전국가 역할 잊지 말아야
내가 이공계 연구예산을 걱정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학문 생태계의 재생산을 걱정하는 인문사회계 연구자들에게 이공계 연구예산은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물론, 이공계의 현실도 그리 녹록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적은 보상, 불확실한 미래 속에 긴 고단함을 견뎌내야 하는 실험실 수련은 갈수록 매력 없는 진로가 되어 왔다. 트렌드에서 한발 떨어져 있는 분야일수록 어려움이 크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과학자를 기초연구의 길로 이끌어 온 주된 동인은 일의 재미, 그리고 사회에 보탬이 되겠다는 사명감이다. 실제 내가 아는 대덕의 한 연구자는 기업과 대학에서 좋은 조건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지만 장고 끝에 국책연구원에 남았다. 재미있어하는 연구에 더 집중할 수 있고 그 연구를 통해 공공선에 기여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무엇을 말하는지 명확하게 적시되지 않은 '카르텔'과 비효율을 이유로 5조 원 이상 규모의 국가 연구개발(R&D) 예산이 일거에 삭감됐다.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던 과학자들일수록 열패감과 자괴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그런 과학자들에게 정부는 제 살 깎기 계획은 물론 명분까지 제공하기를 요구한다고 한다. 연구자 집단 전체를 잠재적 범법자로 규정한 이 일은 어쩌면 예산 자체를 깎은 것보다 더 심각한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일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고, 어려운 일일수록 사람이 어떤 마음을 먹느냐가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번 일의 영향은 연구기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많은 중소기업의 혁신이 사실상 국가 연구개발 프로젝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 업계의 현장 엔지니어들을 대상으로 제조 생태계 및 일자리 변화를 조사해 보니, 친환경 및 스마트 자동차 부문의 부품 공급 생태계에서 예상보다 한층 더 노동시장 이동이 활발했다. 경력이 풍부한 전문인력 영입은 완성차 업체를 비롯한 대기업 기술 획득의 주요 통로가 되고 있었다. 완성차와 더불어 미래형 자동차를 견인할 핵심 부품 양산의 라인업을 빼곡히 갖춘 한국의 자동차 제조 생태계는 능력 있는 인재들이 종으로 횡으로 움직이며 혁신을 만들어내는 활력의 장이지만, 이런 에너지가 중소기업에는 잘 미치지 않는다. 한국 노동시장의 수직적 위계가 동반하는 임금과 노동조건, 평판의 거대한 격차로 전문인력을 유치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진 중소기업이 드물기 때문이다. 부품 혁신 기반을 제공하는 중소기업이지만, 어렵게 확보하고 키운 인력을 지키기도 힘겹다. 그나마 숨통을 틔워주는 것이 국가의 연구개발 예산 및 국책 연구기관과의 협업이었다. 이 예산은 그동안 내연 기관차 중심이었던 중소 부품사와 그 인력들을 친환경·스마트 자동차 산업으로 옮겨 타게 해 주는 역할도 해 왔다.
프레드 블록과 마리아나 마주카토 같은 사회과학자들은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것처럼 보이는 국가들조차도 잘 들여다보면 혁신을 뒷받침하는 발전국가 역할을 해 왔다고 설명한다. 기술 혁신의 조건 조성, 새로운 고성장 분야에 대한 전략 수립, 가장 불확실한 연구 단계에 대한 자금 지원 등의 방법을 통해서다. 이들 연구자는 범용기술의 상용화를 모니터하며 산업 혁신의 돌파구를 마련하는 데까지 주도적 역할을 해 온 국가를 강조하며, 지속가능한 기술 거버넌스 수립의 중요성을 촉구한다.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이 선진 산업국들이 연구개발에 얼마나 열심인지 우리는 알고 있었다. 바로 옆 일본부터가 한국에 비해 3배 가까이 예산을 쓰면서도 최근 광폭의 증액을 감행했다. 급변하는 기술적 환경에서 우리가 연구개발 예산을 줄인 효과는 앞으로 어떻게 나타날까?
이번 과정에서 우리가 알게 된 사실 하나는 국가 예산 배정 시스템에 민주적 시스템은 없었다는 점이다. 전문가 숙의 과정을 포함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만 허약했다. 시대착오적 '벌 주기'식 조치도 하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점 하나가 이번 사안의 소득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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