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룰 수 없는 숙제, 상속세 개편]
<중> 뒤처진 한국
대기업, 미성년 자녀에 수십 억 증여
부의 재분배 말하면서 부의 이전 적극
사회적 공감대 형성 가로막아
상속‧증여세 취지가 ‘부의 재분배’라는 점에 이견이 없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의견이 엇갈린다. 상속‧증여세를 완화하면 기업 투자가 늘어 소득 재분배 효과로 이어진다는 게 경영계 주장이지만 정작 ‘부의 이전’에 더 적극적이다. 개편 논의가 ‘부의 대물림을 강화한다’는 틀에 갇혀 공전을 거듭하는 것도, 개편 전제 조건인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미진한 것도 이런 기업 행보와 무관하지 않다는 평가다. 대기업 오너 일가의 미성년 자녀 주식 증여를 중심으로 부의 이전을 살펴봤다.
29일 한국일보가 기업분석연구소 ‘리더스인덱스’에 의뢰해 분석한 국내 500대 기업 오너 일가의 미성년자 주식 보유 현황을 보면, 상위 50위 미성년자 주식 부호의 1인당 평균 자산은 13억2,000만 원으로 나타났다. 그중 10세 이하가 14명이다.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중견기업 위주로 미성년 자녀에 대한 주식 증여가 활발하다”며 “상대적으로 감시가 심한 대기업집단(자산 5조 원 이상)으로 지정되기 전에 절세 목적 증여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미성년자 주식 부호 1위는 정몽익 KCC글라스 회장의 아들 한선(16)군이다. 주식평가액(이달 4일 기준)은 84억800만 원. 1년 전(73억1,800만 원)보다 10억 원 넘게 증가했다. 2위는 대한제강 오치훈 사장의 아들 준환(15)군이다. 평가액은 56억9,200만 원으로, 같은 기간 자산가치가 20.5% 늘었다. 이승훈 에스엘미러텍 사장의 장녀 정민(19‧48억8,300만 원)양, 최창영 고려아연 명예회장의 외손자 이승원(18‧33억6,200만 원)군이 뒤를 이었다.
공동 7위에는 코로나19 당시 진단 키트로 수혜를 본 씨젠 천경준 회장의 외손주 7명이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적게는 3세, 많게는 17세로 이들의 주식평가액은 4일 기준 각각 22억5,500만 원이다. 코로나19 종료와 맞물려 주가가 하락하자, 천 회장은 절세 차원에서 지난해 28억 원의 주식을 이들에게 나눠 줬다. 구자열 한국무역협회 회장이자, LS 이사회 의장의 첫 손자인 건모(생후 11개월)군은 태어난 후 E1 지분(8,400만 원)을 받았다. 정재연 한국세무학회장(강원대 교수)은 “합법적인 증여겠지만, 이러한 대물림은 부의 재분배를 강조하는 경영계의 상속‧증여세 완화 명분을 약하게 하는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상속‧증여가 부의 축적에 미치는 효과가 점차 커지는 것도 공감대 형성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김낙년 동국대 명예교수 분석에 따르면 부의 축적에서 상속‧증여가 기여한 비중은 1980~90년대 27~29%에서 2000년대 들어 42%로 상승했다. 부를 쌓을 기회가 많았던 고도 성장기가 끝난 만큼 개인 노력보다 물려받은 부가 자산 형성 규모를 결정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안전판 마련 없이 상속‧증여세 인하가 이뤄진다면 기회의 불평등 확대, 근로 의욕 저하로 경제 활력마저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로 이어진다.
그렇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두 번째로 높은 상속세율(50%)을 유지하는 것도 부담이다.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는 “승계 문제 때문에 기업을 일부러 키우지 않는 등 한국 경제 역동성을 저해하는 원인이 되는 높은 상속‧증여세율은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재연 회장은 “상속‧증여세 인하 효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뒤 국민적 합의부터 마련해 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미룰 수 없는 숙제, 상속세 개편] 글 싣는 순서
<상> 먼저 나선 선진국
<중> 뒤처진 한국
<하> 개편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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