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허 이태준' 전집 1차분 4권 출간
읽기 그 자체의 즐거움 주는 작품들
심미적 문학관 상허의 미문 엿보여
#. 매번 경찰보다 빨리 한강에 빠진 여성을 구조하는 남성. 언젠가 부잣집 미인을 구해 결혼까지 할 심산으로 멀쩡한 아내도 쫓아냈다. 오늘도 “여자가 물에 빠졌다”는 비명을 듣고 달려가 건져낸 여자의 “밉지 않은” 얼굴에 흡족해하던 남성은 이윽고 깨닫는다. 처지를 비관해 자살한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을.
#. 크리스마스의 기쁨을 세상 모두에게 알리고 싶은 여성.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집으로 초대해 융숭하게 대접한다. 의미 있는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천사와 같은 마음으로 잠든 여성은 이튿날 아침 길길이 분노한다. 가장 아끼는 새 자동차에서 어제 왔던 사람들 중 “제일 보기 흉한 늙은 것”이 얼어 죽어 있는 탓이다.
상허(尙虛) 이태준(1904~?)의 단편소설 ‘미어기(메기의 방언)’와 ‘천사의 분노’의 줄거리다. 1934년 펴낸 단편집 ‘달밤’에 실린 이 소설들은 '조선의 모파상 또는 오 헨리'라는 그에 대한 비유가 무리한 상찬이 아님을 알게 한다. 간결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서술과 극적 반전의 단편소설은 한 세기 전에 쓰였다는 걸 실감하기 어렵다. 근대 단편소설의 완성자, 모더니스트, 비경향 문학이 낳은 최고의 작가, 국어 교과서에 실린 근대 작가…. 이런 문학적 수식어가 오늘날 이태준의 작품을 마주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될지도 모른다는 헛걱정이 들 정도다.
일제강점기 한국 문학계에 “시는 지용(정지용 시인), 문장은 태준”이란 말을 떠돌게 한 바로 그 문장가, 이태준 전집이 출판사 열화당에서 나왔다. 전체 14권 가운데 1차분 4권 중 1권에는 중·단편 소설, 희곡, 시가, 2권엔 아동문학이 실렸다. 3권은 장편소설 ‘구원의 여상’과 ‘화관’으로, 4권은 ‘제이의 운명’으로 구성됐다.
이태준은 월북 작가이기에 이름이 온전히 불리지 못하고 한때 ‘이○준’으로 통했다. 해금 직후인 1988년과 2001년 세 차례 전집이 나왔지만 아동문학과 장편소설을 포함한 전집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수의 산문과 평론도 처음으로 소개될 계획이다. 이태준의 조카인 김명렬 서울대 명예교수가 2015년부터 그의 원고를 모으며 이 작업에 뛰어들었고, 완간 목표는 2028년이다.
애정 어린 시선 속 ‘자기 반성’
이태준 전집의 문을 여는 건 첫 단편집 ‘달밤’. 표제작 ‘달밤’에는 “태고 때 사람처럼 우둔하면서 천진스러운 눈을 가진” 황수건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신문 보조 배달, 학교 급사(잔심부름꾼)에 이어 화자인 ‘나’가 준 돈으로 시작한 참외 장사도 밑천만 까먹고 실패한 “똑똑지 못한 반편”인 그이다.
밝은 달이 뜬 밤, 불빛 없는 길을 일본 유행가의 첫 소절만 반복해 부르며 평소 피우지 않던 담배를 뻑뻑 빨면서 지나가는 그. 그런 그가 무안해할까 나무 그늘에 몸을 감추고 “달밤은 그에게도 유감한 듯하였다”고 읊조리는 ‘나’의 시선은 애틋하다. 이처럼 이태준의 소설은 풍자의 대상인 인물일지라도 조롱이 아닌 애정으로 그린다. 가난한 농민, 만주로 간 이민자, 젊은 나이에 사별한 색시 등 근대 식민지에 적응하지 못하고 뒤처진 이들에 대한 애수다.
1925년 등단 이후 작가, 신문사 학예부 기자·부장, 전문학교 작문 강사, 잡지 ‘문장’ 편집자로 일했던 지식인의 동정심이나 허위의식이라는 비판적인 시선도 존재한다. 그러나 자전소설을 여러 권 펴낸 이태준의 작품은 다분히 반성적이다. 약자를 위한 기사를 쓰려 기자가 됐던 K가 선정적인 소재를 찾으러 유곽으로 향했다가 창부가 된 독립운동가의 딸을 만나고 도망치듯 빠져나오는 ‘아무 일도 없소’는 무기력한 지식인에 지나지 않는 자기 성찰로 읽힌다.
곳곳서 느끼는 미문의 정취
정지용 시인이 ‘지용문장독본’의 서문에서 “나도 산문을 쓰면 쓴다. 태준만치 쓰면 쓴다고 변명으로 산문 쓰기 연습으로 시험한 것이 책으로 한 권은 된다”고 밝혔을 정도로 문장이 빼어난 그다. 오늘도 논술 작문의 글쓰기 교본으로 쓰이는 ‘문장강화’의 저자로 이름을 아는 이가 적지 않다.
형용사 하나하나의 정확성을 따지고, 완성된 문장이라도 몇 번이고 고치는 심미적인 문학관을 가졌던 이태준의 글에서는 곳곳에서 미문의 정취가 느껴진다. “이만(이맘) 때가 되면 진달래가 앞뒷산에 불붙듯 피어올라 강물과 동리가 온통 꽃빗에 붉어 있었다”(‘봄’) “입김같이 따스한 햇볕이며 커튼이 불룩해지는 향기로운 바람은 스팀 위에 놓은 히아신스 꽃분을 물결치는 듯이 싸고돌았다”(‘구원의 여상’) 등의 문장은 계절을 훌쩍 곁으로 가져온다.
700쪽(1권 기준)에 가까운 책, 그것도 전집을 펼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당장의 지식 습득이 목적이 아니라면 조금은 부담이 덜하지 않을까. 이태준 역시 ‘고전’이란 글에서 “완전히 느끼기 전에 해석부터 가지려 함은 고전에의 틈입자(闖入者)임을 면하지 못하리니 고전의 고전다운 맛은 알 바이 아니요 먼저 느낄 바로라 생각한다”고 썼다. 머리 아픈 문학적 이론이나 분석은 뒤로하고 그저 글은 그 자체로 느끼면 그만이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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