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수사의 시작을 복기해 보니]
김명수 "형사처벌" 언급하며 檢에 그린라이트
윤석열의 중앙지검, 전광석화처럼 수사 착수
문재인 "의혹 반드시 규명" 검찰에 힘 실어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가 진행될 경우 모든 인적·물적 조사자료를 적법한 절차에 따라 제공할 것이며, 사법행정 영역에서 필요한 협조를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2018년 6월 15일 김명수 당시 대법원장)
2018년 6월 15일, 판사 블랙리스트와 법관 사찰 의혹으로 법원 내부가 들끓고 있던 때. 김명수 당시 대법원장은 대국민담화를 통해 전임 양승태 사법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자들에 대한 검찰 수사에 협조할 것임을 약속했다. 사법부 수장의 이 발언은 검찰에 ‘그린라이트’를 켜 주며 대법원 문을 활짝 열어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수사 선봉에 선 서울중앙지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6월 18일, 윤석열 검사장이 이끄는 서울중앙지검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를 최정예 부서인 특수1부에 배당하고, 대법원을 상대로 한 초유의 수사에 전격 착수한다. 이 수사의 실무 책임자가 바로 당시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를 지휘하던 한동훈 3차장검사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 관련자 자택과 대법원 압수수색에 착수했고, 급기야 그해 11월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을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했다. 이듬해 1월엔 헌정사상 처음으로 전직 사법부 수장(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구속하며 대어를 낚는 데 성공했다.
이 수사는 오롯이 서울중앙지검의 자의적 선택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봐야 할까. 전후 상황을 따져 보면 그렇게 보긴 어렵다. 문재인 당시 대통령은 수사가 한창이던 그해 9월 사법부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사법농단’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강력한 대응을 주문했다. 그는 “지난 정부 시절의 사법농단과 재판거래 의혹이 사법부에 대한 국민 신뢰를 뿌리째 흔들고 있다”며 “의혹은 반드시 규명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검찰 수사에 큰 힘을 실어주는 발언이었다.
검찰에 힘 실어준 청와대와 민주당
여당인 민주당도 이에 동조했다. 이해찬 당시 대표는 양 전 대법원장의 행위를 “이런 짓”이라고 질책하며, 검찰 수사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민주당은 당 차원에서 국정조사와 법관 탄핵 등을 언급하며 전방위적 압박에 나서기도 했다.
결국 사법행정권 남용 수사는 대법원장이 신호를 주고 청와대·여당이 밀어주면서 검찰이 총대를 메고 끌고간, 행정·입법·사법부의 합작품이었던 셈이다. 양 전 대법원장이 지난해 결심공판에서 최후 진술 기회를 얻어 "사법부에 대한 정치세력의 엄혹한 공격이 이 사건의 배경이고, 검찰이 수사라는 명목으로 그 첨병 역할을 한 것"이라고 호소한 이유다.
그러나 이 사건을 5년 가까이 들여다본 1심 법원은 양 전 대법원장의 47개 혐의 중 단 하나도 유죄로 인정하지 않았다. 양 전 대법원장과 두 대법관이 재판에 개입할 권한 자체가 없었고, 설령 권한이 있었더라도 검찰의 혐의 입증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부 직권남용이 인정되는 재판 개입과 법관 불이익 행위 등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과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이 주도했을 뿐 양 전 대법원장 등의 공모는 없었다고 봤다. 이날 판결 소식을 접한 수도권 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검찰 수사를 받은 법관 대부분이 모욕감을 느꼈을 만큼 수사가 무리했다"며 "끼워맞추기식 기소의 말로"라고 평가했다.
법원의 봐주기가 문제일까?
물론 이번 판결은 1심인 만큼 2·3심에서 다른 판단을 받을 여지는 분명히 있다. 박근혜 정부 인사들에게 직권남용 유죄를 줬던 법원이 대법원 수뇌부와 고위법관들에게 유독 깐깐한 '직권남용 성립 기준'을 들이대며, 거의 모든 사건을 무죄로 판단하고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최초로 폭로했던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에서 "재판 개입 사실은 인정된다면서 무죄라면 재판거래 피해자들은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나"라며 "양승태 전 대법원장 수족들은 귀신의 지시를 받은 것이냐"고 재판부를 질타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불거질 당시 목소리를 높였던 한 지방법원의 판사도 "실제 문건이 대법원 재판 결과 등에 반영된 것에 대법원장이나 법원행정처장(박병대·고영한)의 지시나 개입이 전혀 없었다는 건데 이게 가능한가"라며 "직권남용이 있었는데 공모가 없었다는 판단은 이해가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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