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수교와 단교 임박해 대만에 통보
사전에 특사파견 등 맹방 예우 없어
대만 반발로 관계복원 크게 지연돼
편집자주
<정진황의 앵글>은 외교 안보 현안에 대한 주요 인물 인터뷰와 소재를 다룹니다. 안보 현안만큼 다양한 논점이 제기되는 분야도 없습니다. 여러 각도에서 보고자 합니다.
한국 외교에서 아픈 손가락이 있다면 첫 수교국인 대만과의 단교가 그러하다. 현실과 실리 외교에 따라 오랜 친구를 끊어서이기도 하지만 그 과정도 매끄럽지 못했다.
대만과의 깊은 인연은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국민당이 중국 본토를 장악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장제스는 상해임시정부의 후원자였고, 김구의 귀국 전엔 대대적 환송연과 함께 전별금도 줬다고 한다. 6·25전쟁이 터지자 국공내전에서 패해 타이완섬으로 밀려난 장제스는 보병 3개 사단을 파병해 돕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공산당이 장악한 중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한 미국이 막았다. 1948년 8월 정부 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은 먼저 대만에 조병옥 특사를 파견할 정도로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고, 첫 수교도 맺었다. 반공을 기반으로 한 형제국 유대였다. 장제스와 이승만 주도로 1954년엔 아시아반공연맹이 결성되기도 했다.
오랜 맹방관계는 한중 경제관계가 무르익고,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가속화로 균열이 갔다. 중국은 수교 협상에서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우며 대만과의 단교를 요구한 반면 우리는 동일 사안인 북한과의 단교를 관철해내지 못했다. 1992년 8월 한중 수교와 대만 단교 움직임이 공개되면서 대만에서는 태극기가 불태워지는 등 반한 시위에 불이 붙었다. 주중화민국 한국대사관에 시위대의 달걀과 돌이 날아들고, 대사관 직원은 물론 상사 주재원의 안전 보호를 경찰에 요청해야 할 정도로 반한 감정이 극에 달했다. 한국 유학생의 집단폭행 등 피해사례도 속출했다. 1992년 8월 24일 단교가 이뤄지고, 대한민국 대사관 현판이 내려졌다. 정부 수립 후 첫 번째로 창설된 재외공관의 폐쇄와 함께 43년 맹방관계가 끝났다. 노태우 대통령은 “국제사회에서 예외 없이 인정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우리도 불가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며 한중 수교와 대만 단교를 발표했다.
물론 대만과의 단교가 미국, 일본 등 자유진영에 속한 국가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이뤄졌던 점에 비춰 당시 결정을 마냥 비판할 수 없다. 일본보다 20년이나 더 의리를 지켜 대만의 마지막 아시아 교두보가 됐지만 단교 과정에서 맹방에 걸맞은 존중과 배려를 하지 못한 점이다. 일본은 1972년 중일 수교와 함께 대만과 단교하기 전 특사 파견, 총리 친서 등을 통한 예우로 반발을 무마했다. 한국은 한중 수교 비밀 협상 과정에 “옛 친구를 버리지 않는다”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1992년 8월 18일 중국과의 수교 교섭 진전을 알린 지 나흘 만인 21일 대만에 단교 통보를 했다. 사전에 특사 파견도 없었으니 대만으로부터 “배은망덕하다”는 말을 들었다. 단교 이후 관계에 대한 사전 교섭을 하지 못해 '비공식 관계정상화', 즉 대표부 설치 합의는 11개월 뒤 이루어졌고, 민간의 정상관계 회복까지는 12년이 걸렸다. 단교 당시 주중화민국 한국대사관 1등서기관으로 근무한 조희용 전 캐나다 대사는 회고록 '중화민국 리포트'에서 “존중과 대우를 소홀히 해 결과적으로 양국의 실질관계 회복이 늦어진 점은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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