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왕비를 괴롭힌 음란한 풍자 만화

입력
2024.02.04 19:00
수정
2024.02.05 10:12
25면
0 0
김선지
김선지작가

정치 포르노에 부역한 예술

'둘은 하나다(Les deux ne font qu'un)', 1790~1800년, 프랑스 정치만화 컬렉션, 미국 의회 도서관

'둘은 하나다(Les deux ne font qu'un)', 1790~1800년, 프랑스 정치만화 컬렉션, 미국 의회 도서관

판화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려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로 묘사한다. 프랑스 혁명기에 그려진, '둘은 하나다'라는 제목이 붙은 정치 풍자만화다. 왼쪽에는 통통한 얼굴에 장밋빛 뺨, 한 쌍의 뿔이 다린 염소의 몸을 가진 루이 16세가 보인다.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가 남편 몰래 외도를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것은 단순히 뿔이 아니라 오쟁이 진 남편의 상징으로, 성불능이라는 소문이 있는 루이 16세를 비웃은 것이다.

작품 속 마리 앙투아네트의 신체는 하이에나다. 머리는 여러 마리의 뱀과 타조 깃털로 장식돼 있다. 메두사를 연상시키는 뱀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악한 마녀 같은 여성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타조 깃털은 오스트리아를 뜻하는 'Autriche'와 비슷한 발음이 나는 타조의 프랑스어인 'autruche'를 연관시킴으로써 오스트리아 출신 왕비를 조롱하는 의미로 쓰인 것이다. 왜 국왕 부부는 이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진 것일까?

격변의 시대 한가운데에서

잔 다르크, 루이 14세, 나폴레옹을 제외하고는 프랑스 역사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만큼 유명한 인물도 없을 것이고, 그녀만큼 혹독하게 명예가 난도질당한 여성도 드물 것이다. 프랑스와의 외교를 위해 루이 16세와 정략 결혼하게 된 오스트리아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는 14세 어린 나이에 베르사유에 온 이후, 프랑스혁명 당시 38세로 처형될 때까지 일생 대부분을 욕을 먹고살았다.

프랑스 국민은 처음부터 적국 출신의 외국인 왕비를 매우 싫어했다. 명랑하고 활발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궁정의 젊은 귀족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다. 사치스러운 패션과 보석, 도박과 무도회에 탐닉했고, 측근과 함께 밤새 파티를 즐기곤 했다. 베르사유 영지에 지은 별궁 프티 트리아농의 인테리어를 위해 많은 돈을 써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그녀는 위엄 있는 여왕보다는 현대의 할리우드 셀럽에 가까웠다. 어머니인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가 서신을 통해 딸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할 정도로 왕비답게 처신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대중은 그녀의 호사스럽고 방탕한 생활 때문에 국가 재정이 바닥났다며 격렬한 비난을 퍼부었고, 혁명가들은 왕비를 단죄하고 군주제를 무너트려야 한다고 선동했다. 그녀는 뒤늦게 자신과 왕실이 심각한 정치적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깨닫고 검소한 생활을 하려고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사실, 앙투아네트가 모든 죄를 뒤집어쓸 일은 아니었다. 루이 16세가 왕위에 올랐을 때, 프랑스는 이미 태양왕 루이 14세 때 치른 수많은 전쟁 때문에 재정 궁핍 상태였고, 루이 16세 통치하에서는 미국 독립전쟁에 자금과 군대를 지원한 것으로 인해 프랑스 재정은 바닥난 상태였다. 여기에, 수년간 이어진 한파로 농작물 작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치솟은 빵값 때문에 굶주리고 있었고, 곳곳에서 값싼 빵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나는 등 민생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국민이 왕과 왕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혁명의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하려고 했으며, 무기력한 루이 16세 대신해 의회에 참석해 해결책을 모색했다. 하지만 그녀는 근본적으로 철저한 왕정주의자였다. 국민 고통을 결코 이해하지 못했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어떤 현실적 노력도 하지 않았다. 대신, 유럽 군주들에게 혁명 세력의 새 헌법이 실현 불가능하고 부조리하며 의회는 '미치광이, 또는 짐승의 무리'라고 쓴 비밀 편지를 보내며, 프랑스를 침공해 무너진 왕권을 되찾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루이 16세에게는 베르사유와 파리 사이에 군대를 배치해 혁명군과 싸울 것을 촉구했다. 또한, 온건 혁명파인 라파예트와 미라보가 제안한 입헌군주제를 거부하도록 왕을 압박했다. 이런 상황에서 왕실과 의회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던 미라보가 급사하자 국왕 부부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봉착했다. 결국 오스트리아로 도주해 외국 군대를 끌어들이려 했고, 이것이 발각돼 1793년, 단두대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겨냥한 음탕한 풍자화

언제부터인가 은밀하게 마리 앙투아네트를 성적으로 조롱하는 풍자 만화와 불법 팸플릿, 음란소설이 프랑스와 다른 유럽 국가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그 내용과 그림은 끔찍할 정도로 외설적이고 무자비했지만, 이런 정치 포르노의 파급력은 엄청났고 전제군주제를 무너뜨리는 데 한 축을 담당했다. 특히, 1789년 대혁명 이후, 엄청난 양의 포르노 인쇄물이 쏟아져 나왔다. 팸플릿 제작자들은 간통, 레즈비언 행위, 근친상간, 적과의 내통 등 중상모략과 명예훼손을 서슴지 않았다.

루이 16세의 동생 아르투아 백작과 밀회를 즐기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지켜보는 왕을 그린 팸플릿(왼쪽) 폴리냑 백작부인(혹은 랑발 공주)과 사랑을 나누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그린 팸플릿(오른쪽)

루이 16세의 동생 아르투아 백작과 밀회를 즐기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지켜보는 왕을 그린 팸플릿(왼쪽) 폴리냑 백작부인(혹은 랑발 공주)과 사랑을 나누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그린 팸플릿(오른쪽)

시궁창 언론들은 저널리즘의 탈을 쓰고 베르사유 궁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사실적으로 보도하는 것처럼 가장했으나, 실제로는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동원해 온갖 거짓말을 꾸며대고 대중을 자극하고 선동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암캐', '암컷 늑대', '오스트리아에서 온 괴물', 그리스 신화의 반인반수 괴물 '하피'로 표현되었으며, 프랑스 국민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 혹은 기생충으로 일컬어졌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야기는 2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전기, 소설, 오페라, 연극, 발레, 영화 등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여전히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치와 방탕에 탐닉한 왕정주의자, 혹은 프랑스혁명의 희생양?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책임이 있었는지, 아니면 시대의 희생자였는지에 대해서는 보는 방향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다. 아마도 양극단이 아닌, 두 지점 사이의 어딘가에 진실이 숨어 있지 않을까?

분명한 것은 정치 포르노에서 묘사된 난잡한 성스캔들은 사실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젊은 시절의 경박한 놀이와 사치를 절제하고 뒤늦게나마 왕비다운 처신을 하려고 했고, 가난한 농부나 고아를 돌보는 것 같은 선한 일도 했다. 실제로 인자하고 부드러운 성격이었고, 스웨덴 출신 무관 페르센 백작과의 로맨스 외에는 아내로서 어머니로서도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혁명세력에게는 반동적인 왕정주의자이자 공화정의 적이었지만, 그녀를 겨냥한 막장 드라마는 마리 앙투아네트로서는 몹시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불행히도 마리 앙투아네트가 살았던 18세기 말 프랑스는 왕정시대가 저물고 시민계급이 급부상한 계몽주의와 혁명의 시대였다. 그녀는 자신이 역사적 격변의 시기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고, 외세의 도움만 받는다면 이전의 왕정으로 복고할 것이라고 믿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공주로 태어나 프랑스 왕비로, 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호화로운 궁전에서 살았던 그녀는 바깥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통치자의 권위란 혈통이나 타고난 신분에 의해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왕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책임과 의무를 다할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