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88년생 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와 93년생 곽민해 뉴웨이즈 매니저가 2030의 시선으로 한국정치, 한국사회를 이야기합니다.
YH무역 사건이 있고 한 달쯤 지난 1979년 9월 16일,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는 뉴욕타임스 특파원 헨리 스톡스와 인터뷰를 갖는다. 그는 이 인터뷰에서 박정희 정부에 미온적인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을 압박했다. "지미 카터가 박정희의 위신을 높여줘 인권 탄압을 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었다"는 날 선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이 인터뷰는 박 정권의 심기를 제대로 거슬렀다. 박 대통령과 공화당, 유정회 소속 의원들은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서 품위를 손상했다"며 그의 제명을 추진했다.
국회에서 제명안이 통과되기 하루 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김영삼 총재에게 만남을 요청했다. 서울 장충동 안가에서 김영삼을 만난 그는 "뉴욕타임스 보도가 사실과 다르다는 이야기를 해 달라"며 사정했다. 제명이 가져올 여파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영삼은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결국 제명안은 통과됐다. 김영삼은 성명서를 통해 이렇게 주장했다. "나는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살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만일 이때 김영삼이 '잠시 사는 길'을 택했다면, 현대사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부마항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고 민주주의는 더 늦게 찾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영원히 사는 길'을 걸었고 결국 대통령이 됐다.
정치에서는 종종 앞에 놓인 마시멜로를 먹지 않는 게 큰 보상으로 이어지곤 한다. 국민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목전의 이익에 연연하는 소인배보다 대의를 위해 묵묵히 제 갈 길을 걷는 대인에게 표를 주고 싶은 게 국민 마음이다. 기성 정치권이 병립형이니 준연동형이니 하는 자잘한 표 계산에 빠져있을 때, 제3지대 정당들이 그런 대인의 기개를 보여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이낙연·이준석을 비롯한 제3지대 정치인들은 눈앞에 놓인 선거를 위해 합당을 선택함으로써 선거 너머의 미래를 포기해 버렸다.
불과 한 달, 아니 일주일 전까지 서로 신경전을 벌이던 이들이 덜컥 합당해 버린 모습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이준석은 혐오주의자"라고 비난하던 분들은 왜 이준석을 중심으로 한 정당에 합류했으며, 류호정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공언하던 분들은 왜 달라진 게 없는 그와 손을 맞잡았나. 가치는커녕 방향성도 불분명한 이번 합당이 선거철마다 반복되던 이합집산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솔직히 4월 총선에서 제3지대가 원내교섭단체 지위를 얻을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들의 자강을 염원했던 건, 그 적은 의석이 훗날 정치 개혁의 씨앗이 될 수 있을 거란 기대에서였다. 대통령제를 채택한 나라들에서는 최근 군소정당의 지도자가 개인기로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후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키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많은 의석을 얻지 못하더라도 그런 기회는 분명 찾아갔을 거다. 그러나 명분 없는 합당은 그 일말의 가능성을 없애버렸다.
합친 이들은 당이 쪼개질 일은 없다고 확신하고 있지만, 한 발짝 떨어진 입장에서 보면 지금의 끈끈한 연대는 선거 이후 모래성처럼 무너지지 않을까 싶다. 잘되면 주도권 싸움을, 안 되면 책임 공방을 벌이면서. 아, 이렇게 다시 한번 바른미래당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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