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커지는 동남아 디지털 경제
2030년 경제 규모 1조 달러 급성장 예상
인니 '스타트업 요람', 베트남 '페이 천국'
편집자주
2023년 2월 한국일보의 세 번째 베트남 특파원으로 부임한 허경주 특파원이 ‘아세안 속으로’를 통해 혼자 알고 넘어가기 아까운 동남아시아 각국 사회·생활상을 소개합니다. 거리는 가깝지만 의외로 잘 몰랐던 아세안 10개국 이야기, 격주 금요일마다 함께하세요!
#1. 인도네시아 기자 이스밀라(39)의 하루는 차량 공유 업체 고젝(Gojek)과 함께 시작한다. 출근하거나 취재 장소로 향할 때 애플리케이션(앱)에 목적지 입력만 하면 자동차나 오토바이가 배차되고, 요금도 자동 결제돼 현금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 식사 후에는 전자지갑 서비스 오보(OVO)로 결제한다. 필요한 물건은 전자상거래 업체 토코페디아(Tokopedia)에서 주문한다.
휴가나 출장을 갈 땐 여행 앱 트라벨로카(Traveloka)로 항공·숙박을 예약하고, 쌈짓돈은 투자 플랫폼 비빗(Bibit)에 넣어 둔다. 이스밀라는 지난해 11월 한국일보와 만나 “이 앱들은 내 삶의 구원자”라며 “지갑 없이는 살아도 휴대폰 없이는 일상을 살아갈 수 없다”고 강조했다.
#2. 이달 10일 태국 방콕의 한 전통시장. 길거리 음식점, 옷과 기념품 가게 등 골목을 따라 쭉 이어진 매대마다 QR코드 종이가 붙어 있었다. 한 노점에서 80바트(약 3,000원)짜리 팟타이(볶음면)를 주문하며 “현금이 없는데 QR 스캔 결제를 해도 되느냐”고 묻자 “물론이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휴대폰에서 한국 시중은행 앱과 연동된 글로벌 지급 결제 시스템을 켠 뒤, 화면을 QR코드에 갖다 대자 1분도 안 돼 태국 바트화가 원화로 환산돼 음식값이 지불됐다. 가게 주인 사이난 웨이자복은 “그간 관광객은 주로 현금을 냈는데, 몇 년 새 스캔을 사용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며 “가게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도 잔돈을 많이 준비할 필요가 없어 편리하다”고 말했다.
많은 인구+경제 성장+감염병 확산=디지털 혁신
느린 인터넷과 낙후된 정보통신기술(ICT) 인프라, 신기술보다는 저렴한 인건비를 기반으로 하는 제조업 중심 경제. ‘동남아시아’ 하면 흔히 떠오르는 이미지다. 그러나 동남아는 디지털 혁신 불모지가 아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집부터 직장까지, 모바일 기반 서비스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회원국 시민들의 일상 깊숙이 파고든 지 오래다.
동남아 디지털 경제 성장세는 가파르다. 지난해 11월 구글과 싱가포르 국부펀드 테마섹, 글로벌 컨설팅 업체 베인앤컴퍼니가 공동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2,180억 달러(약 291조 원)였던 아세안 지역 디지털 경제 규모는 내년 3,000억 달러(약 400조 원)로 급성장한 뒤, 2030년쯤엔 최대 1조 달러(약 1,336조 원)까지 확대될 것으로 예측됐다.
디지털 경제는 △전자상거래(이커머스) △전자결제 금융 △차량 공유·음식 배달 △미디어 등 인터넷을 기반으로 이뤄진 디지털 서비스의 총상품거래액(GMV)을 의미한다. 보고서는 세계 모든 지역의 디지털 경제 규모가 커지고 있지만, 동남아 성장 속도가 유독 빠른 점에 특히 주목했다.
이는 동남아에서 인구와 경제, 그리고 감염병 확산이라는 ‘삼박자’가 맞물린 결과다. ①아세안 10개국 평균 연령은 30세. 6억 명 넘는 전체 인구 가운데 15~35세 비율이 60%에 이를 만큼 ‘젊고 역동적인 땅’이다. 다른 지역보다 정보 기술에 비교적 친화적인 청년층이 많다는 의미다.
②성장세도 뚜렷하다. 옥스퍼드이코노믹스는 올해 동남아 경제성장률을 4.2%로 내다봤다. 코로나19 이전 시기(5~6%대)보다는 낮지만, 현재 세계 평균이 2%인 점을 감안하면 두 배 이상 높다. 이와 함께 중산층이 부상하면서 IT 기반 서비스가 쉽게 자리 잡을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됐다.
③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 대유행)은 빠른 디지털화(化)에 불을 붙였다. 이 기간 전자상거래, 원격 수업 등 디지털 서비스를 처음 이용한 신규 소비자는 6,000만 명에 이른다.
동남아는 ‘아시아의 실리콘밸리’
아세안 국가들은 스타트업(신생 벤처 기업)의 전쟁터가 됐다. 과거 미국이나 중국, 일본 등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스타트업들이 최근 몇 년 새 동남아로 눈을 돌리는가 하면, 그랩(승차 공유 플랫폼)과 쇼피(전자상거래 플랫폼) 등 2010년대 중반 동남아 현지에 설립된 회사들도 성장을 거듭해 이젠 뉴욕 증시 상장을 추진한다. 동남아를 일컬어 ‘아시아의 실리콘밸리’라고도 하는 이유다.
가장 뜨거운 곳은 인도네시아다. 유니콘(기업 가치 10억 달러 이상 비상장 스타트업) 이상 회사가 16개로, 동남아에서 싱가포르(25개·지난해 3월 기준) 다음으로 많다. 베트남(4개)과 태국(3개), 필리핀·말레이시아(각각 2개)가 뒤를 잇고 있다.
유니콘을 꿈꾸는 스타트업도 2,400개(2023년 기준)나 된다. 미국 인도 영국 캐나다 호주에 이은 세계 6위다. 지난해 호주 멜버른대 아시아링크센터는 “도시국가 싱가포르와 달리, 2억7,000만 명의 거대한 인구를 가진 인도네시아는 내수 시장이 탄탄하고 디지털에 능숙한 청년층이 많아서 유니콘의 ‘차세대 요람’이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베트남도 전자상거래와 핀테크(금융+IT) 업체가 빠르게 성장하는 국가다. 전자지갑 플랫폼 모모페이, VN페이 등 현지 유니콘 기업 절반이 핀테크 회사다. 잘로페이, 페이유 등 다른 결제 플랫폼까지 합치면 그 수를 헤아리기도 어렵다.
신용카드 보급률이 4%(2023년 기준)로 낮고, 카드 단말기가 설치되지 않은 곳도 많은 까닭에 가게에서 계산을 하려고 카드를 내밀면 “페이 결제를 해 달라”는 요청을 받기 일쑤다. 전자상거래 시장 역시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다. 2021년 180억 달러에서 지난해 300억 달러 규모로 커졌고, 내년엔 430억 달러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말레이시아와 필리핀도 디지털 시동을 걸고 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두 국가의 스타트업은 탄탄한 수익을 추구하는 투자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핫스팟’으로 입소문을 타고 있다”고 전했다.
도농·국가 간 격차 해소해야
그러나 디지털 혁신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도 짙다. 무엇보다 취약한 디지털 교육 시스템이 빠른 성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또, △아세안 10개국 간 좁혀지지 않는 디지털 격차 △도시와 농촌 간 불균등한 인프라 등도 시급히 개선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포스트는 “디지털 전환이 빨라질수록 도농 간 디지털 격차가 더욱 커지는 게 문제”라며 “대도시 디지털 환경은 나날이 급속하게 발전하는 반면 농촌 지역은 정체 상태에 머물면서, 디지털 빈부 격차도 심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앤서니 토 싱가포르 난양공대 S.라자라트남 국제학연구소장은 “캄보디아, 라오스는 이웃 국가에 비해 (디지털 성장이) 더디긴 해도 따라잡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정정 불안을 겪는 미얀마의 성장세는 훨씬 뒤처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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