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노동: ⑥선진국, 선진기업들의 도전]
스웨덴 게임사 일 6시간 근무제 실험
회의·연락 줄어 집중력↑... 성공 거둬
미국·아이슬란드·칠레 등 세계 각국도
노동시간 감축 노력, 기업비용도 감소
"처음에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의심도 많았죠. 하지만 결국 회사도, 직원도 모두 만족했습니다."
2014년 12월, 스웨덴의 아동용 게임업체 필리문더스(Filimundus)는 한 실험에 도전했다. 8시간 근무제의 틀을 깨고 노동시간을 2시간 줄인 '6시간 근무제'를 도입한 것이다. 임금도 삭감하지 않았다. 복지 선진국이라는 스웨덴에서도 꽤나 파격적 시도였다.
결과는 대성공. 회사 최고경영자(CEO) 리누스 펠트는 지난달 한국일보와의 다섯 차례 서면 인터뷰에서 "일하는 시간이 줄어도 생산성에는 변화가 없거나 오히려 증가했다"고 단언했다. 집중력이 향상되고 피로가 사라진 덕이다.
특히 정교한 작업이 요구되는 프로그래머와 그래픽 아티스트의 생산성이 높아졌다. 병가 사용 횟수도 25% 정도 줄었다. 노동시간 감축이 건강에 긍정적 영향을 줬다는 방증이다. 리누스는 "구직자들 사이에서 필리문더스의 기업가치가 폭발적으로 높아졌다"며 "회사 입장에선 생산성을 유지하면서 더 경쟁력 있는 지원자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성공 비결을 '집중 시간'의 힘에 있었다. 필리문더스는 점심시간 전후 3시간을 집중 업무 시간으로 정하고, 일에 방해되는 모든 가짜노동을 없앴다. ①반드시 필요한 회의는 안건을 모아 하루에 처리하고, 나머지 날엔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다. ②이메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사용 등 불필요한 연락 역시 자제했다. ③대신 이전에 따로였던 점심을 함께 먹도록 해 직원들끼리 유대감을 유지하게 애썼다.
리누스는 "회사의 노동시간 감축을 제안하자, 직원들도 자발적으로 집중력 향상에 힘쓰는 등 변화에 동참했다. 노사가 협력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해외에선 '노동시간' 단축 실험 골몰
필리문더스 사례에서 보듯, 노동시간 단축은 가짜노동을 막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시간 자체를 줄이면 노동자가 쓸데 없는 일부터 없애기 때문이다. 기업만이 아니다. 국가나 지방정부 차원에서 노동시간을 감축하기 위한 실험이 곳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州)는 2022년 주 정부 최초로 관련 법안을 발의했다. 500명 이상 노동자를 고용하는 사업장을 대상으로 주 5일 40시간 근무제를 주 4일 32시간 근무제로 전환했다. 임금도 그대로 유지했다. 또 초과근무를 할 경우 급여의 1.5배 넘게 수당으로 지급해야 한다고 법안에 명시했다. 메릴랜드주도 지난해 7월 주 4일제를 시범 도입하는 기업에 최대 1만 달러의 세제 혜택을 주는 법안을 내놨다.
아이슬란드는 2015년부터 4년간 아예 정부 주도로 주 4일제 실험을 했다. 회사원, 유치원 교사, 사회복지사 등 전체 노동인구의 1%가 참여했다. 주 4일제와 함께 가짜노동을 감소하려는 여러 방안도 병행했다. 기업들은 티타임을 줄이고 짧은 회의를 도입했다. 실험은 6년이 지난 2021년 전체 노동 인구의 86%로 확대됐다. 효율성이 입증됐다는 뜻이다.
영국과 벨기에, 스페인, 스코틀랜드, 캐나다, 브라질 등 역시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다. 특히 칠레가 주목된다. 이 나라는 연간 노동시간이 1,963 시간(2022년 기준)으로 한국과 비슷한데, 칠레 하원은 지난해 4월 주 45시간에서 40시간으로 줄이는 내용의 개정안을 압도적 표차로 가결했다. 결과에 따라 우리가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회의 계산기' 도입까지... '관습' 싹 바꿔
노동시간뿐 아니라 해외 선진기업들은 생산성을 가로막는 비효율을 척결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미 캘리포니아주에 본사를 둔 의류기업 쓰레드업(ThredUp)은 2020년부터 관행으로 포장된 비효율 업무를 싹 바꿔나가고 있다. 우선 300여 명의 전 직원을 상대로 ①효율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법과 ②이메일을 적게 보내는 방법을 교육했고, ③불필요한 회의를 20%가량 줄였다. 집중 시간을 가졌던 필리문더스와 비슷하게 ④매주 화요일을 '집중 요일'로 정해 불필요한 보고, 회의 등 가짜노동도 배제했다.
효과는 확실했다. 2022년 기준 쓰레드업의 자발적 이직률은 4%로, 2020년 실험 돌입 전의 절반 이하로 줄었다. 직원 설문조사에서도 '회사가 이전과 동일한 목표를 달성하고 있다'고 여기는 직원의 90% 넘게 '나의 생산성이 높아졌다'고 답했다. 신입사원의 절반 이상 역시 쓰레드업의 근무 형태가 입사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조사됐다.
캐나다 다국적 전자상거래업체 쇼피파이(Shopify)도 빼놓을 수 없다. 쇼피파이는 지난해 초부터 3명 이상 참여하는 반복 회의를 모두 취소하는 '카오스몽키(Chaos Monkey)' 정책을 실시했다. 불필요한 회의를 줄이기 위해 '회의 비용 계산기'를 출시하기도 했다. 회의 초청 이메일을 보내거나 회의 일정을 기록할 때 참석자 수, 시간, 평균보상 데이터 등을 고려한 회의 가격 추정치를 제시하는 식이다. 계산기를 돌려보니 3명이 30분 동안 회의할 때 드는 비용은 최대 1,600달러(214만 원)에 달했다.
회사는 또 매주 수요일을 '회의 불가 날'로 지정하고, 캘린더 프로그램을 차단했다. 노력은 결실을 맺어 쇼피파이는 지난해 5월까지 1만2,000개의 행사와 회의를 취소할 수 있었다. 1인당 평균 회의시간도 14% 감소했다. 쇼피파이 측은 "카오스몽키 추진 전보다 18% 더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는 등 업무 생산성 향상에 성공했다"고 밝혔다.
제도만 갖추면 한국도 불가능하지 않다
다른 나라와 기업들의 여러 사례는 우리도 업체 및 업무 특성에 맞는 제도만 갖춰지면 가짜노동은 물론 일하는 시간도 줄일 수 있는 전망을 가능케 한다. 서지용 상명대 경영학부 교수는 "노동시간 감축이 가능한 업종과 부서 위주로 주 4일제 도입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대면 회의 등으로 가짜노동 퇴출이 비교적 쉬운 정보기술(IT) 업계 등에서 우선 도입을 검토해 봄직하다는 설명이다. 서 교수는 "일하는 시간을 줄이는 것은 직원 개인의 행복 추구에 그치지 않는다"며 "제조업의 산업재해 보험료를 비롯한 기업의 각종 운영 비용을 감소시키고 생산성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주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는 "법과 제도로 노동시간 감축을 이끄는 프랑스처럼 한국도 정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며 "다만 중소기업과 영세기업에도 혜택이 돌아갈 수 있게 안배해 양극화의 위험을 방지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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