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사기꾼의 덫 '선순위 가등기'
피해자 강제경매해도 입찰자 '제로'
"가등기 허점, 제도 보완해야"
"전세금반환소송에서 이겨서 강제경매만 들어가면 끝일 거라 생각했는데 더 큰 산이 있었네요. 변호사들도 답을 모른다고 하는데 도대체 전 어떡해야 하나요?"
지난해 전세사기특별법에 따라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받은 김민정(가명·35)씨는 마지막 희망이라 여긴 강제경매에서도 전세금을 돌려받을 길이 원천 차단됐다며 괴로워했다. 전세사기꾼들이 남긴 '가등기'라는 마지막 덫 때문이었다. 한국일보 취재 과정에서 김씨 같은 피해자가 속속 나오고 있다.
경매시장에선 가등기가 걸린 전세사기 피해 주택의 경우 유찰이 거듭돼 경매 최저가격이 감정가격의 10% 수준까지 떨어진 사례도 확인됐다. 가등기 전세주택은 누구도 쳐다보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처럼 가등기가 걸린 주택은 경매시장에서도 처리가 안 돼 결과적으로 피해자 구제가 불가능한 구조다. 전세사기특별법에도 관련 내용이 없다. 정부도 뒤늦게 사태 파악에 나섰다.
소유권이전청구권 가등기가 뭐기에
서울 관악구 봉천동 한 빌라에 살고 있는 김모씨는 전세사기 피해자다. 전세금 1억9,000만 원을 돌려받지 못했다. 본보가 확인했더니 이 사건에 연루돼 사기 등 혐의로 최근 검찰에 송치된 이만 23명에 달했다. 조직적인 전세사기였다.
김씨는 현 집주인 A씨(검찰 송치) 상대로 지난해 말 전세금반환소송을 걸어 승소한 뒤 연초 강제경매에 착수하려고 변호사 상담을 받던 중 등기부등본에서 특이한 점 하나를 발견했다. 전세 입주하고 1년 뒤쯤인 2016년 8월 2일 B씨가 소유권이전청구권 가등기를 걸어둔 사실이다.
소유권이전청구권 가등기는 미래에 이 집을 소유할 예정이라며 일종의 매매 예약을 걸어두는 것을 일컫는다. 보통 집을 살 때 계약금과 잔금을 치르기까지 길게는 1년씩 시차가 발생한다. 집주인이 나쁜 마음만 먹으면 이를 악용해 이중 매매를 할 수 있는데, 가등기는 이런 부작용을 막기 위해 도입된 제도다.
이 제도의 가장 큰 특징은 '순위 보전' 효력이다. 가등기 상태에선 소유권이 넘어온 게 아니어서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다. 하지만 가등기를 신청한 이가 본등기를 하는 순간 소유권 시점이 본등기 날짜가 아니라 가등기 신청날로 소급된다.
가령 2016년 2월 28일 가등기를 한 이가 2024년 2월 28일 본등기를 했다면 이 사람의 주택 소유권 취득 날짜는 본등기 날짜가 아니라 가등기를 한 2016년 2월 28일이 된다는 얘기다. 2016년과 2024년 사이 이뤄진 다른 권리는 모두 말소된다. 가등기 이후 집을 산 이는 자동으로 소유권을 잃게 된다는 얘기다.
희망 없는 경매만 쳐다보는 피해자들
전세사기 피해자는 이런 사실을 뒤늦게 파악할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김씨처럼 전세로 들어갈 당시엔 등기부등본이 깨끗했기 때문이다.
최근 경매시장엔 이처럼 가등기가 걸린 전세사기 주택이 쏟아지는 분위기다. 전세사기특별법 이후 정부의 경·공매 지원이 늘어나면서 경매에 들어갔다가 뒤늦게 가등기 실체를 발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본보가 지지옥션에 의뢰해 확인했더니 올 1월부터 최근까지 선순위 가등기가 걸린 전세사기 피해 주택 30여 건이 경매로 나왔다. 업계에선 지난해 초중반부터 이런 추세가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경매 결과는 어떨까. 서울 강동구 천호동 한 빌라는 세입자 6명이 각각 강제경매를 신청했다. 이 빌라는 2020년 4월 23일 집주인이 한모씨로 바뀌었고, 같은 날 정모씨가 모든 집마다 소유권이전청구권 가등기를 걸었다.
가등기 탓에 입찰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경매업체가 제공하는 분석보고서엔 "만약 가등기 된 매매 예약이 완결되는 경우 매수인이 소유권을 상실할 수 있다"라고 적혀 있다. 이런 이유로 이 빌라는 9차례 유찰돼 입찰 최저가격이 최초 감정가격(3억400만 원)의 11% 수준인 3,264만 원까지 떨어졌다.
낙찰자는 입찰 최저가격(3,264만 원)을 포함해 세입자가 신청한 배당금(보증금 2억7,000만 원)을 물어주면 빌라 주인이 된다. 감정가 3억400만 원보다 3,400만 원 싸게 살 수 있지만 만약에 정모씨가 본등기를 하면 소유권이 넘어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한 빌라는 세입자 신청으로 강제경매에 부쳐졌지만 20여 차례 유찰된 뒤 최저가격이 감정가격의 1%까지 떨어져 지난해 10월 경매 자체가 기각됐다. 전세사기 피해자 카페에도 가등기에 경매가 막혔다는 토로 글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그럼에도 피해자들이 경매에 매달리는 이유는 뭘까.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는 기존 주택 매수 희망자에게 우선매수권을, 계속 거주 희망자에겐 공공매입을 추진하고 있지만 가등기 주택은 구조상 불가능하다.
이주현 지지옥션 연구위원은 "누군가 이 같은 조건을 감수하고 낙찰받아야만 전세금을 배당받을 수 있기 때문에 유찰돼도 계속하는 것"이라고 했다.
최악의 덫 가등기, 사기꾼 안전장치였다
전세사기꾼들은 왜 이런 최악의 덫을 놓은 걸까.
법상 가등기는 집주인(등기의무자)과 가등기 신청자(가등기권자)의 공동 신청이 원칙이다. 예컨대 김씨 사례에서 첫 번째 집주인이었던 C씨(바지집주인)가 B씨에게 가등기 신청을 허용해 줬고, 가등기가 된 집을 살 이유가 만무한데도 A씨(부동산 직원)가 매입해 현 집주인이 됐다. A, B, C씨 모두 한 패다. A씨가 소유한 빌라만 43채로 확인됐다.
전세사기 큰 틀은 무자본 갭투자다. 전세금으로 집값을 치른 뒤 바지 집주인을 앉히고 전세 갱신 때마다 전세금을 올려 부당이득을 올린다. 특히 2019년부터 집값과 전셋값이 뛰며 이 같은 무자본 갭투자가 초기승을 부렸다. 이 때문에 바지 집주인이 여기에 편승해 곧바로 집을 파는 걸 막으려고 안전장치로 가등기를 악용했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한 빌라업계 관계자는 "사기꾼들에게 빌라는 전세금을 올려 받는 수단이라 가등기를 통해 언제든 다시 빌라 소유권을 가져가려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가등기는 신청한 이가 철회(말소)하지 않으면 가등기를 한 날로부터 10년까지 그 효력이 사라지지 않는다. 뒤집어 얘기하면 전세사기 피해자는 무려 10년 동안 강제경매를 통한 전세금 반환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셈이다. 세입자가 사해행위 소송으로 가등기를 말소하려면 전세사기꾼들이 부당한 목적으로 가등기를 걸었다는 걸 세입자가 입증해야 한다.
김용우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세입자가 가등기 원인을 무효라고 입증하는 건 상당히 어렵다"며 "법적 허점이 발견된 만큼 정부가 제도 보완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김씨는 혹시라도 이들이 가등기를 다시 연장하는 건 아닌지가 제일 불안하다. 주무 부처인 국토부는 "현황을 파악해 보고 문제가 있으면 바로 보완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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