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국정농단: ⑥직권남용 전성시대]
연간 2.8만건이나 접수되며 '일상화된 범죄'로
정권마다 칼날 휘두르는 방향 달라져 비판도
편집자주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헌법재판소의 역사적 선고가 나온 지 7년이 지났습니다. 그사이 '국정농단'이라는 이름 아래 이뤄진 수사와 재판은 모두 마무리됐습니다. 국정농단은 대한민국 정치 지형을 재편했을 뿐 아니라, 법원과 검찰 조직에도 큰 파장을 남겼습니다. 국정농단이 이 나라에 남긴 유산과 숙제는 무엇인지, 이 사태가 세상을 어떻게 바꿨는지를 찬찬히 돌아보기 위해, 한국일보는 법조인 50명을 상대로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수사·재판 과정에 관여했거나, 사건을 가까이서 살펴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증언과 각종 통계, 기록 등을 바탕으로 '2,555일(7년)의 기록'을 다시 정리해 보려 합니다.
※국정농단 수사와 재판 7년의 총평가, 수사 과정, 재판 결과, 바뀐 정치 지형을 다룬 이전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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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권남용. 공무원이 자기 권한을 원래 목적이나 범위를 벗어난 상태로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이 죄를 규정하는 것은 형법 제123조. 법조문상 이 죄의 정의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름처럼 단순히 '권한을 함부로 썼다'고 성립하는 게 아니라, 그 요건이 꽤나 복잡하다. ①원래부터 자신의 권한인 일을 ②함부로 남용해서 ③다른 사람이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④타인의 권리행사를 방해해야만 성립한다. ①→②→③이나 ①→②→④가 연속적으로 입증되어야 유죄로 인정되는 것이다.
검찰발 기사에 자주 언급되면서 익숙한 범죄인 듯하지만, 이 입증의 어려움 탓에 사실 국정농단·적폐청산·사법농단 수사 이전에는 거의 사문화되다시피했다. 직권남용 입증이 어렵다는 건 사법농단 의혹으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고영한·박병대 전 대법관이 최근 1심에서 '전부 무죄'를 받은 사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유죄를 받아내기 어려운 죄가 어떻게 검찰의 비장의 무기, 전가의 보도가 될 수 있었을까?
국정농단이 히트시킨 직권남용
비밀은 '국정농단 수사의 성공'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대다수 국민의 성원하에 이뤄졌던 국정농단 수사·재판이 '직권남용 전성시대'의 기반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한국일보는 국정농단이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들여다보기 위해, 당시 국정농단 수사·재판에 직접 관여했거나 머지않은 거리에서 지켜봤던 판사·검사·변호사·헌법재판연구관·교수 등 법조계 인사 50명에게 역사적·사법적 평가를 요청했다.
본보에 답을 준 법조계 인사들은 "국정농단이 대대적으로 직권남용을 홍보한 셈"이라는 진단에 대체로 동의했다. 본보가 대검찰청을 통해 확보한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검찰에 접수된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 건수는 2만8,106건에 달한다. 2016년 4,586건에 비해 약 6배나 증가한 수치다.
그러나 고발이나 수사의뢰는 빗발치지만, 실제 사법처리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어 실제 기소율은 2016년 이후 줄곧 0%대를 기록하고 있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두 차례 정권이 바뀌면서 직권남용죄를 마치 정파적으로 이용하는 듯한 분위기가 계속되며 무의미한 고소·고발이 늘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 차장검사 출신 변호사는 이 현상을 "적폐청산 수사 이후, 직권남용죄가 세상에 널리 알려져 많이 고소하고 자주 고발하면서 일상화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고위공직자에게 경각심 준 효과
물론 모든 직권남용 관련 고소·고발이나 인지수사를 '정치적 공세'만으로 보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다. 특히 국정농단 사태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등을 보면 실제 직권남용으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어졌고, 법원도 이를 유죄로 판단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있었던 '환경부 블랙리스트'(박근혜 정부에서 임명된 기관장에게 사표 제출 요구) 사건에서도, 2022년 1월 대법원은 직권남용 등 혐의로 기소된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의 징역 2년형을 확정했다.
대법원까지 직권남용을 유죄로 봤다는 건 공직자의 권한 남용이 실제 엄존한다는 의미다. 국정농단과 적폐청산을 통해 직권남용죄가 널리 알려지면서, 고위공직자에게 경각심을 심어준 긍정적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예전에 직권남용죄가 사문화돼 있다는 것은 그만큼 공무원 재량이 과거에 컸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임 교수는 "직권남용 유죄는 '법에 의해 권한을 행사해야 하고 법에 근거하지 않고 남용하면 처벌된다'는 메시지를 던져 '대통령도 법 위에 있을 수 없고 법치주의를 제대로 세워야 한다'고 보여준 셈"이라고 설명했다.
죽은 권력만 노리는 직권남용 수사
그러나 '직권남용 전성시대'의 폐해를 지적한 다수 전문가들은, 직권남용죄라는 조항 자체가 아니라 그 칼자루를 쥔 주체(정권과 검찰)의 법 적용 행태에 문제가 있다고 강조한다. 문재인 정부 검찰은 이명박·박근혜 정부 관계자들을 직권남용죄로 피고인석에 세웠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자 칼이 향하는 방향도 함께 바뀌며 이번엔 윤석열 정부 검찰이 문재인 정부 인사들을 직권남용 혐의로 대거 수사했다.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서훈 전 국가안보실장,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 서욱 전 국방부 장관 등), 탈북어민 북송 사건(정의용·서훈 전 안보실장,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 월성원전 경제성 조작 의혹(김수현 전 청와대 정책실장, 백운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등 문재인 정부 인사를 노린 직권남용죄 적용 사례들은 이어졌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직권남용의 칼이 향하는 방향이 달라지다 보니, 직권남용죄가 정치적 보복에 악용될 수 있단 비판은 갈수록 설득력을 얻고 있다. 본보와 인터뷰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정작 살아 있는 권력엔 적용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있다"며 국정농단이 죽은 권력의 허물을 널리 알리는 '부관참시'에만 활용되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기도 했다.
법원에선 줄줄이 무죄 판결
양쪽 정권에서 넘긴 직권남용 사건들은 결국 법원에 다 모였다. 법원은 직권남용 재판에서 매우 신중한 입장을 유지했다. 혐의 자체가 추상적이고 모호해 지나치게 넓게 해석하면 악용될 수 있다는 허점을 대체로 경계하는 입장에 가까웠다. 본보 인터뷰에 응한 현직 지방법원 부장판사 역시 "공무원의 재량과 관련된 부분이기 때문에, 직권남용을 제한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남용될 여지가 너무 크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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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법원의 엄격한 해석에는 '자기 조직 지키기'라는 숨은 의도가 숨어 있다는 의심도 끊이지 않는다. 양 전 대법원장과 두 전직 대법관의 '통무죄' 판결을 두고선, 법률사무소 법과치유의 오지원 변호사는 "법원이 제대로 처벌해야 할 사안까지 지나치게 엄격하게 해석해 처벌하지 않는 게 오히려 문제"라고 지적했다.
검찰 단계에선 '정권 입맛에 맞는 수사', 법원 단계에선 '지나치게 엄격한 해석'이란 문제를 노출한 직권남용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본보가 인터뷰한 일부 법조인은 "직권남용죄 요건을 좀 더 구체화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무리한 고발과 수사, 기소를 막기 위해서라도 판례 또는 입법을 통해 직권남용죄의 성립 요건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면서 "(동시에) '직권이 없어 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형식 논리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해석도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기계적 법 적용을 지양하고 국민들의 법 감정과의 간극을 줄일 판결을 고민할 필요도 있다는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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