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국정농단: ⑨위상강화된 헌재]
朴 탄핵 이후 '정치적 사법기구' 역할 각인
민주주의 발전 vs 정쟁 도구화 평가 갈려
편집자주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헌법재판소의 역사적 선고가 나온 지 7년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 '국정농단'이라는 이름 아래 이뤄진 수사와 재판은 모두 마무리됐습니다. 국정농단은 대한민국 정치지형을 재편했을 뿐 아니라, 법원과 검찰 조직에도 큰 파장을 남겼습니다. 국정농단이 이 나라에 남긴 유산과 숙제는 무엇인지, 이 사태가 세상을 어떻게 바꿨는지를 찬찬히 돌아보기 위해, 한국일보는 법조인 50명을 상대로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수사·재판 과정에 관여했거나, 사건을 가까이서 살펴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증언과 각종 통계, 기록 등을 바탕으로 '2,555일(7년)의 기록'을 다시 정리해 보려 합니다.
※국정농단 수사와 재판 7년의 총평가, 수사·재판 결과, 바뀐 정치 지형, 직권남용 수사가 남긴 폐해, 사면의 문제점을 다룬 이전 기사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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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건은 헌법재판소에 어떤 의미였나요?"(기자)
"뭐라고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사건이었죠."(전직 헌재 연구관)
국정농단과 대통령 파면(탄핵 인용)은 국회, 사법부, 행정 각부 등 여러 헌법기관에 상당한 파급효과를 줬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를 겪은 곳이 바로 헌재였다. 국정농단이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한국일보가 법조인 50명을 상대로 인터뷰한 결과, 헌법 관련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박 전 대통령 탄핵으로 헌재 위상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고 △그 영향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존재감 각인... 정쟁 사건 증가
대통령 탄핵 인용 과정에서 헌재가 확실히 존재감을 각인했다는 사실에 이견이 없다. 박 전 대통령 탄핵 심판은 처음부터 끝까지 '헌정 사상 처음 경험하는 일' 투성이었다. 헌재는 2016년 12월부터 2017년 3월까지 20차례의 공개변론을 열었고 심판정에는 25명의 증인이 출석했다. 헌재 소식은 하루가 멀다 하고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이정미 당시 헌재소장 권한대행이 박 전 대통령을 파면한 2017년 3월 10일 헌재에 대한 주목도는 극에 달했다.
높아진 위상은 '박근혜 탄핵'에서 멈추지 않았다. 2012~2016년 연평균 사건 접수 건수는 1,794건에 불과했지만, 탄핵이 인용된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는 그 수가 2,753건까지 뛰어올랐다. 같은 기간 연평균 사건 처리 건수도 1,809건에서 2,626건으로 증가했다.
특히 정쟁의 한복판에 헌재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탄핵 심판이 대표적이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불거진 법관(임성근 전 서울고법 부장판사) 탄핵과 '이태원 참사'의 책임을 물은 장관(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탄핵은 각각 각하(청구 자체가 부적법해 소송이 종결되는 것)와 기각으로 끝났다.
더불어민주당이 '검찰개혁'의 일환으로 추진한 손준성·안동완·이정섭 검사 탄핵은 심리 중이다. 박 전 대통령 이전의 탄핵 심판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중립 위반 사건뿐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제 헌재를 통한 공직자 탄핵은 '뉴노멀'(새로운 표준)이 된 셈이다.
여기다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등 권한쟁의심판이나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위헌 소송 등 정치인들이 풀어내지 못한 사건도 꾸준히 헌재로 넘어오고 있다. 실제 권한쟁의심판은 2009년 12건을 마지막으로 내내 한 자릿수였다가 지난해 다시 10건으로 뛰어올랐다. 한 전직 헌재 연구관은 "박 전 대통령 탄핵으로 헌재가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정치인들과 전 국민이 처음 느낀 데다 정치의 극단화가 되어 헌재가 더욱 주목을 받는 형국"이라며 "'정치적 사법기구'로서의 헌재의 역할이 점점 커지고 있는 건 분명하다"고 분석했다.
민주주의 성숙? 정쟁 가속화?
법조계에서는 헌재가 정쟁을 매듭짓는 종착지로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상황을 두고, 각기 장단점이 있다고 본다. 일단 긍정 평가를 하는 입장에서는 이것 또한 '민주주의의 발전'이라고 판단한다. 헌법 전문 변호사는 "탄핵 및 권한쟁의 심판 활성화는 '삼권분립의 정신'을 실현한 것"이라며 "헌재가 사법 시스템·정치 성숙화 과정에서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어 "국회의 탄핵 추진은 공직사회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탄핵 사건의 법리가 어느 정도 안정화가 됐고, 헌재가 탄핵 사건을 다루는 노하우도 생겼다고 한다. 탄핵 인용 사례는 전 세계적으로 희귀해서 해외 헌법재판 관계자들도 한국 사례에 큰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전해졌다.
악영향도 있다. 일단 탄핵 사건이 들어오면 다른 사건 심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현재 재판연구관은 75명이고, 일반 사건은 연구관이 1명씩 배정돼 검토한다. 그러나 탄핵 등 정치적 사건은 전례도 별로 없고 중요도가 매우 높아 연구관이 더 많이 투입된다. 공개 변론도 여러 차례 하는 등 다른 사건에선 거의 하지 않는 절차도 거친다. 결국 그만큼 다른 사건에 투입되는 인적 자원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실제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는 지난해 8월 말 기준 미제 사건이 1,576건이고 이중 2년이 지난 사건은 486건에 달해 심판이 지연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헌재법에 따르면 헌재는 사건이 접수된 뒤로부터 180일 내에 선고를 해야 하는데, 이젠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여기다 헌재가 '정쟁의 도구'로 전락했다는 평가도 있다. 헌재가 마음대로 소송을 거부할 수 없는 점을 이용해 정치인들이 탄핵과 권한쟁의심판 등을 악용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헌법 전문 교수는 "잘못된 민사소송을 제기하면 상대방의 소송비용을 물어내야 하고, 무분별한 고소를 하면 무고죄로 처벌받을 수 있지만, 탄핵 등은 정치적 부담을 지니는커녕 오히려 자기 진영에서 환호를 받는다"고 개탄했다.
정치인 소권 남용·탄핵 제도 손 봐야 할까
이참에 헌재와 관련한 각종 제도를 점검하고 손질할 필요성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단 헌재 연구관을 충원해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정쟁 사건이 늘어나고 일반 사건도 늘어났기 때문에 그만큼 인력이 늘어나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 전직 헌재 연구관은 "헌재가 처리하는 사건은 단심제인 데다가 '리딩 케이스'가 될 수 있어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재의 인력 사정으로는 사건 처리 기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헌재 연구관은 법관과 달리 법에 정원이 규정돼 있지 않아 예산을 늘리면 연구관을 늘릴 수 있다.
정치인들의 소권 남용 제한은 논란거리다. 헌법을 전공한 한 교수는 "탄핵심판 등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유인은 큰 반면 사회를 극단화하는 등 부작용은 거세다"며 "탄핵이 인용되지 않을 경우 이를 추진한 의원들에게 법적으로 페널티를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헌재 연구관을 지낸 이황희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추진한 세력이 정치적으로 심판받았던 역사를 고려하면, 앞으로도 잘못된 탄핵의 역풍은 거셀 것이라 법적 페널티가 필요한가 싶다"고 밝혔다. 헌재가 정치인들의 소권 남용으로 판단되는 사건에서는 명확하게 경고를 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헌재가 각종 정치적 사건을 단순히 '판단'하는데 그쳤기 때문에 정치인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 때처럼 급박하게 탄핵 심판이 이뤄져야 할 경우 운용 방식에 대한 논의도 뜨겁다. 헌재는 형사재판이 진행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실관계를 확정하고 박 전 대통령을 탄핵했다. 헌재는 "탄핵심판절차는 형사절차와는 성격을 달리 한다"고 밝히긴 했지만 이후 박 전 대통령 형사재판에서 일부 무죄 판결이 나오면서 탄핵의 정당성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한 헌법 전문 교수는 "박 전 대통령 때처럼 탄핵을 급하게 처리해야 한다면 제도적 취약점이 논쟁거리로 떠오를 것"이라며 "사건의 중대성과 시급성 등을 모두 고려해서 사건 처리 방법 등이 결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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