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과 작가 소설집 ‘하이라이프’
마약, 아파트, 끊임없는 소비 등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욕망 그려
“세면대 위, 작은 은쟁반에 일렬로 늘어놓은 코카인 가루를 코로 흡입”하는 남자. 그는 세븐일레븐에서 가장 비싼 생수를 사고, 스타벅스에서 트리플샷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서 생각한다.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진정한 일꾼은 나와 같은 소비자이지, 노동자가 아니라!” 별다른 목적 없이 남산 하얏트 호텔과 명동예술극장,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 명동 신세계백화점, 시청 앞 플라자호텔 등을 현실과 비현실 속에서 오가는 그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박태원·1934)을 2024년에 ‘더 나쁜 쪽으로’ 재현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김사과 작가의 단편 8편이 실린 소설집의 표제작 ‘하이라이프’는 코카인을 쉴 새 없이 흡입하며 서울 도심을 배회하는 남성의 이야기다. 약 100년 전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던 구보가 고질적인 피로와 고독, 우울로 ‘삼비스이(3B水)’라는 신경쇠약에 듣는다는 약을 먹었다면,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그에게는 코카인이 있다. 매년 마약사범이 급증하고 이제 피자 한 판 가격으로 마약을 살 수 있게 된 오늘날 대한민국의 초상이다.
“누군가 내게 2020년대의 한국이 어땠냐고 묻는다면, 공연히 시간 낭비하지 않고” 김 작가의 ‘하이라이프’를 건네겠다는 금정연 서평가의 말은 이 소설집이 어디를 겨냥하는지를 명확히 드러낸다.
‘중산층’이라는 욕망과 매혹
‘하이라이프’ 속 등장인물의 고민은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것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대학 서열도에 따르면 스카이(서울대·고려대·연세대) 아래아래아래 어딘가 위치하는 A대학교”(‘예술가의 그의 보헤미안 친구’)나 “서울 중산층 시민을 위한 세련된 거주 구역으로 탈바꿈”한 한강 남쪽의 동네의 정점인 ‘H아파트’(‘두 정원 이야기’)라는 배경에서부터 그렇다. 이처럼 쾌적하고 세련된 공간에서 끊임없이 그럴듯한 것을 소비하는 이들은 한국어와 영어를 뒤섞어 사고하며 탐닉한다.
“8~12세가량의 아이들이, 대체로 남자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쇼핑몰에서 사라져 완전히 자취를 감추는 현상”을 다룬 ‘몰보이’도 마찬가지다. 소설에서는 이런 현상에 대해 ”높은 교육 수준을 갖춘 고소득의, 나르시시즘적 성향을 가진 미들클래스 부모가 21세기 하이퍼 모던하며 초경쟁적인 환경에서 자식을 키울 때 발생하게” 된다고 썼다.
이미 중산층이라는 계급을 차지한 일종의 혜택을 받은 부류인 등장인물의 욕망은 저항감과 매혹을 동시에 준다. 그러다 이런 매혹을 느끼는 자신을 깨닫는 순간은 김 작가의 소설이 기능하는 지점이다. 계급의식을 충실히 받아들이고 또 재생산하는 이들은 폭력과 살인, 광기 등이 없이도 서늘한 공포를 자아낸다.
소유의 종말은 어디일까
삶을 소비로 대체해버린 도시의 끝은 어디일까. ‘소유의 종말’에서 살짝 한기가 느껴질 법한 에어컨 냉기가 몸을 감싸는 가운데 나인원한남 고메이494 푸드코트에서 매운 쌀국수를 먹고, 5만8,000원짜리 블루보틀의 싱글 오리진 원두 아이스 카페라테를 주문한 주인공은 이내 VR고글을 벗는다. 2025년에 덮쳐 온 유례없는 위기에서 겨우 살아남은 인류는 “현실세계에 어떠한 악영향도 끼치지 않기” 위해 원하는 삶을 가상현실에서 살기로 했다. 현실에는 아무것도 없다. 사유재산도, 계절도, 빛도.
김 작가는 2005년 데뷔 이후 줄곧 자본주의와 현대의 소비사회를 다뤄왔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단편을 집필한 2020년 김 작가는 채널예스 인터뷰에서 “최근 관심사는 도시의 화이트칼라 계층”이라고 밝혔다. “주류 담론이라든지, 쇼핑몰의 상품들, 도시에 들어서는 새로운 공간들은 죄다 이 사람들을 타깃으로 하여 만들어”지는 탓에 “최근의 도시는 나라를 막론하고, 화이트칼라 계층을 위한 디즈니랜드처럼 느껴진다”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다시 ‘하이라이프’를 읽으면 새삼 우리가 사는 도시가 낯설고 두려워진다.
소설에서 위기 직전이었던 2024년의 현실과 유사하게 세팅된 가상현실을 김 작가는 이렇게 묘사한다. “마음껏 돈을 벌고 무한정 소비하고 아무렇게나 사랑에 빠지는 삶을. 탐욕스럽고 이기적이며, 사악하고, 폭력적인 고통으로 가득한 과거 멍청한 인간들의 삶.”(‘소유의 종말’) 이제 종말까지 딱, 1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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