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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탓이 아냐" 아내의 말에 남편은 10년만에 울음을 터뜨렸다

입력
2024.04.15 04:30
수정
2024.04.25 17:04
6면
0 0

[산 자들의 10년]
<2> 사라진 소년

삼일마트 주인 부부, 은인숙·강병길이 버틴 10년

은인숙·강병길 부부.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은인숙·강병길 부부. 일러스트=신동준 기자



분명 두 보루가 더 있었는데….

야무진 성격의 삼일마트 주인 은인숙은 셈이 틀리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아무리 세도 두 보루가 모자랐다. 찜찜한 마음을 애써 달래며 아들 강승묵에게 전화를 걸었다. 밤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뉴스에 강력 사건이 많이 보도되던 때라 불안감이 엄습했다. "엄마, 저 지금 집에 들어가고 있어요." 아들의 밝은 목소리에 인숙은 마음이 놓였다.

은인숙이 운영한 월피동 삼일마트. 초등학교 후문에 있던 이 마트는 동네에서 유명했다. '마트집 아들' 승묵이를 아는 주민도 많았다. 네이버 로드뷰 캡처

은인숙이 운영한 월피동 삼일마트. 초등학교 후문에 있던 이 마트는 동네에서 유명했다. '마트집 아들' 승묵이를 아는 주민도 많았다. 네이버 로드뷰 캡처

하지만 두 달 뒤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그 소식 들었어? 마트집 아들 실종됐대."

해 질 녘까지 꼬마들이 뛰어놀고, 이웃끼리 서로 자녀를 봐주곤 하는 안전한 안산 월피동에서 아이가 없어지다니. 더구나 초등학교 후문의 삼일마트는 이 동네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집 아이가 사라졌다는 소식은 엄마들을 중심으로 삽시간에 퍼졌다. 마트는 종일 셔터가 내려가 있었다.

셔터에 색색의 메모가 붙기 시작했다. 승묵이는 '마트집 아들'로 불렸다. 말을 해본 적은 없어도 오가며 본 까닭에 얼굴을 기억하는 주민이 많았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렴" "오빠, 꼭 돌아와. 슈퍼에서 기다릴게" "살아 돌아와서 웃는 얼굴 보여줘. 동네 아줌마가"

간절한 마음을 옮겨 적은 편지와 쪽지들은 셔터 주변의 천막과 가로수에까지 빼곡히 붙었다.

승묵이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월피동에 퍼진 이후 삼일마트의 셔터는 내려갔다. 주민들은 아이의 안전한 귀환을 바라는 마음을 포스트잇에 옮겨 적어 셔터에 빼곡히 붙였다. 뉴시스

승묵이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월피동에 퍼진 이후 삼일마트의 셔터는 내려갔다. 주민들은 아이의 안전한 귀환을 바라는 마음을 포스트잇에 옮겨 적어 셔터에 빼곡히 붙였다. 뉴시스

일주일 후. 승묵이를 찾았다는 소식이 돌았다. 사람들은 한달음에 삼일마트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마트집 부부와 아들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주민들에게 보내는 답장이 셔터에 붙어 있었다.

"많은 분들이 걱정해 주셨는데 승묵군은 더 이상 춥지도, 무섭지도 않은 곳으로 여행을 갔습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지만 기억하겠습니다. 응원해 주시고 걱정해 주신 주민 시민 여러분, 감사합니다."

매일 아침 7시부터 다음 날 새벽 1시까지 동네 골목을 환히 비췄던 삼일마트는 그렇게 문을 닫았다.

그때 너희 엄마를 잡지 않았더라면…

"아빠, 엄마 어떻게 만났어?"

민정의 말에 강병길은 직접 기른 야콘을 마저 깎아 접시에 내려놓고 일어났다. 병길의 손은 유독 새카맣고 거칠었다. 하얗던 손이 귀농 6년 만에 변했다. "뿌리가 깊어서 캐기 힘들었는데… 그래도 민정아, 먹을 만하면 하나 더 심을까? 변비엔 이게 최고래."

인숙과 병길은 2년간 연애 끝에 1995년 결혼한다. 각각 스물 다섯, 스물 일곱이던 때였다. 은인숙씨 제공

인숙과 병길은 2년간 연애 끝에 1995년 결혼한다. 각각 스물 다섯, 스물 일곱이던 때였다. 은인숙씨 제공

애써 딴소리를 했지만, 병길은 아내와 처음 만났던 그날을 떠올렸다. 집안 어른들 성화에 못 이겨 선을 보다가 운명처럼 인숙을 만났다. 민망해 어디다 한번 해본 적 없는 말이지만, 인숙의 웃는 얼굴에 첫눈에 반했다. 2년간의 연애는 순탄치 않았다. 인숙의 집안은 두 사람의 궁합이 나쁘다며 반대했다. 이후 인숙이 부모 말을 따라 회사를 그만두고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소식이 끊겼다. 이별 후 병길이 식사를 못 해 병원에 잠시 입원했던 어느 날, 인숙이 병원으로 찾아왔다.

"당신 살려주려고 왔어요."

병길은 그날 다짐했다. 누구보다 든든한 가장이 되겠다고. 그때 아빠가 너네 엄마를 잡지 않았더라면… 딸에게 이런 이야기를 다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승묵이 갓난아기 시절 목욕 사진과 인숙이 쓴 메모. 원다라 기자

승묵이 갓난아기 시절 목욕 사진과 인숙이 쓴 메모. 원다라 기자


1995년 9월. 부부는 마음에 쏙 드는 신혼집을 찾아냈다. 낮은 연립주택 사이 골목마다 햇살이 잘 드는 동네였다. 작은 집이었지만 아이들을 키우기엔 적당해 보였다. 인숙은 두 해 뒤 3월 맏이인 승묵이를 낳았다. 스물일곱 살 인숙은 서툰 엄마였지만 자신이 낳은 작은 생명이 무척 애틋했다. 아이가 첫 배밀이를 하던 날 찍은 사진 밑에는 "목욕하는 줄도 모르고 잠자는 우리 아기, 어서어서 많이 먹고 건강해져라. 사랑한다"고 적었다. 그 어떤 말보다도 진심이었다.

전업주부였던 인숙이 마트를 차리기로 결심한 것도 아이들 때문이었다. 학비를 조금이나마 보태고 싶었다. 장사를 시작한 뒤 늘 잠은 모자랐지만 행복했다. 남편이 출장 간 날이면 가게를 조금 일찍 닫고는 마중 나온 남매 손을 양옆에 잡고 집까지 걸어가던 그 길. 마음이 몹시 꽉 찬 기분이었다. 그해 직전 여름, 한 달 8만 원이던 용돈을 아껴 두 아이가 처음으로 차려준 엄마 생일상엔 '돼지 미역국'이 올랐다. 인근 정육점 사장님에게 전해 들은 말로는 소고기를 살 돈이 모자라 한참을 고민하다 돼지고기를 사 갔다고 했다. 근데 그게 미역국에 넣을 고기였냐고. 인숙은 두 아이를 꼭 껴안고 말했다.

"엄마는 지금 너무 행복해."

인숙·병길 부부는 승묵이가 어릴 적 사진을 참 많이 찍었다. 혼나며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도 너무 귀여웠다. 은인숙씨 제공

인숙·병길 부부는 승묵이가 어릴 적 사진을 참 많이 찍었다. 혼나며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도 너무 귀여웠다. 은인숙씨 제공


벚꽃길에 현수막이 나붙은 날,부부는 동네를 떠났다

웃음 많고 쾌활했던 인숙의 머리카락은 그날 이후 하얗게 변해버렸다. 병길은 실종 일주일 만에 발견된 승묵이를 아내에게 보여주기가 주저됐다. 배가 침몰해 물속에 있었던 시간이 길어 얼굴이 많이 상한 탓이다. 병원 직원은 하루빨리 장례일을 잡자고 재촉했다. 병길은 인숙에게 "승묵이를 마지막으로 보겠느냐"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러나 아내와 함께 아들의 얼굴을 본 병길은 크게 후회했다. 아이의 얼굴은 하루 새 더 까맣게 변해있었다. 인숙은 그 자리에서 실신했고, 그 이후가 기억나지 않는다. 덕분인지 가끔 꿈에 나오는 승묵이는 여전히 희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인숙을 입원시킨 후 병길이 늦은 밤 들른 삼일마트 주변은 형형색색의 메모로 뒤덮여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승묵이를 위해 기도해 줬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이내 '이들 모두에게 아들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덜컥 겁이 났다. "승묵이가…" 혼잣말로 연습해보려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병길은 한참을 꺽꺽 울다 연습장을 찢어 꾹꾹 눌러쓴 글을 셔터에 붙이고 돌아섰다. "승묵이는 더 이상 춥지도 외롭지도 않은 곳으로 떠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승묵이를 보내던 날, 동생에게 부탁해서 그 메모들을 하나하나 포개어 함께 태웠다. '승묵아, 이렇게 많은 사람이 너를 기다렸단다.'

부부도 처음에는 다른 부모들과 함께 청와대로, 광화문광장으로 다녔다. 삭발한 채 끼니를 때우려고 늦게 식당에 들어섰던 날, 얼굴을 알고 지냈던 동네 엄마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아이 먼저 보내놓고 밥이 넘어가?" "보상금 더 받으려고 저러지?"

승묵이와 추억이 있는 벚꽃길을 걷는 인숙·병길 부부. 이제는 아들과 함께 올 수 없는 곳이 됐다. 한국일보

승묵이와 추억이 있는 벚꽃길을 걷는 인숙·병길 부부. 이제는 아들과 함께 올 수 없는 곳이 됐다. 한국일보

그래도 4년을 안산에서 버텼다. 마트 문 닫고 함께 걷던 길, 승묵이가 다녔던 초등학교와 좋아하던 피자집을 보고 있으면 아이가 그 안에서 금방이라도 걸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곳을 떠나면 승묵이와의 기억이 흐릿해질까 봐 겁이 났다.

병길도 생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가끔 떠올렸다. 승묵이가 중학교 1학년 무렵, 퇴근길 아빠를 마중 나온 가족과 함께 빌라 단지 옆 가로수 벚꽃을 봤던 늦은 밤이었다. 바쁜 부모 탓에 벚꽃놀이 한번 제대로 못 해본 아이들은 아빠가 벚나무 사이로 목말을 태워주자 너무 신나했다. 몇 해가 지나서도 그날의 기억을 재잘거리곤 했다.

하지만 승묵이와 함께 뛰놀던 그 벚꽃길은 지방선거를 앞둔 2018년 현수막으로 뒤덮였다.

'납골당 전면 백지화' '화랑유원지에 세월호 납골당이 웬 말이냐' '세월호 전용 납골당 결사 반대'

아들이 떠난 뒤 인숙과 병길은 4년을 안산에서 버텼다. 승묵이와 쌓은 추억이 있어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도시는 이 가족의 트라우마를 수시로 건드리는 공간이 됐다. 일부 시민들은 여객선 참사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공원 조성을 반대하며 험한 표현을 내뱉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아들이 떠난 뒤 인숙과 병길은 4년을 안산에서 버텼다. 승묵이와 쌓은 추억이 있어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도시는 이 가족의 트라우마를 수시로 건드리는 공간이 됐다. 일부 시민들은 여객선 참사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공원 조성을 반대하며 험한 표현을 내뱉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해골 그림까지 그려진 현수막은 아빠의 마음을 후벼 팠다. 인숙은 그해 겨울 문재인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청하며 영하 15도의 날씨에 노숙농성을 했다. 하지만 열릴 줄 모르는 청와대 정문을 보며 '이젠 정말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극심한 스트레스 탓인지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의사는 아이와의 추억이 남아 있는 공간에 더 머물면 인숙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했다. 병길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를 잃었는데, 아내마저 잃을까 봐 무섭다는 말은 현실이 될까 봐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답할 수 없던 질문 "아이는 딸 하나예요?"

새로 이사한 동네는 하루 두 번 텅 빈 시내버스가 오가는 외진 곳이었다. 가족은 오래된 흙집에 보금자리를 꾸렸다. 일부러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곳을 고르고 골랐다.

세 가족이 먹고살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병길은 건축 일처럼 고되게 몸 쓰는 작업만 골라서 했다. 그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아들 승묵이를 잃은 뒤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직장 생활을 15년이나 했고 사업체도 운영했지만, 그 사건 이후로는 물건도 곧잘 잃어버리고 해야 할 일도 자주 까먹었다. 그나마 몸을 쓰면 잡념이 줄었다.

작은 동네에 젊은 가족이 이사 오니 주민들이 관심을 보였다. 조금 가까워졌다 싶으면 여지없이 '아이는 딸 하나냐'고 물었다. 질문에 나쁜 뜻이 담겨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아이를 잃었다'고 답하는 건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하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원래 둘이었는데 하나를 먼저 보냈어요'라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을 피하기 시작했다. 세월호 유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떤 비난이 쏟아질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차에는 흔한 노란색 리본 스티커도 붙이지 않았다. 승묵이의 책상은 어쩌다 마을 이장님이 들르더라도 볼 수 없는 옷방 구석에 뒀다.

은인숙 강병 부부가 안산을 떠나와 이사한 집. 집 안 한 구석에는 승묵이가 사용하던 책상이 그대로 놓여있다. 한국일보

은인숙 강병 부부가 안산을 떠나와 이사한 집. 집 안 한 구석에는 승묵이가 사용하던 책상이 그대로 놓여있다. 한국일보

인숙의 날 선 마음은 가끔 가까운 사람을 향했다. 바로 남편이다. 퇴직금 4,500만 원을 주식으로 잃었을 때도 "괜찮다. 같이 벌면 된다"고 했던 아내였다. 하지만 병길이 승묵이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구조하러 온 해경 지시를 잘 따라서 조심히 나오라"고 했다는 말을 듣고는 분노가 치밀었다. 사실 남편은 죽을 힘을 다하고 있었다. 승묵이가 탔던 배를 바닷속에서 인양할 때 근처 무인도에서 산나물을 뜯어 먹고, 텐트에서 쪽잠을 자며 망원경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남편이 자신과 딸을 돌보려 뛰어다닌다는 걸 알았지만, 인숙은 병길을 원망했다.

시간이 갈수록 유족들이 모인 밴드방도 조용해졌다. '뭔가 해결될 것'이라는 희망이 체념으로 변해갈 무렵 부모들의 부고만 이따금 올라왔다. 50대에 불과한 사람들이었다.

엄마가 우물에서 나온 날

시골에선 창밖 풍경으로 계절을 느낄 수 있다. 겨우내 얼고 녹았던 쪽파가 선명한 녹색을 띠어가면 승묵이 생일인 3월이 돌아온다. 승묵이를 바다에서 되찾은 4월 23일도 어김없이 찾아온다. 해마다 4월은 승묵이네 가족을 다시 그날로 데려간다. 마치 바로 그날인 듯, 뉴스 화면에는 세월호가 등장한다. 조용했던 유족 밴드가 세월호 관련 행사를 알리느라 연중 가장 분주해지는 시기다.

인숙은 생각했다. 자신처럼 부모 같지 않은 엄마는 세상에 아무도 없을 거라고. 다른 엄마들은 끼니마다 아이 방에 식사를 차려주거나, 계절이 바뀌면 새 옷도 걸어준다던데 자신은 아이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어른들 말씀처럼 '후생'이 있다면, 신이 있다면 애초에 그런 일은 벌어지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는 승묵이를 낳고 나선 더욱 정성스레 집안 제사며 차례를 도맡아 지냈다. '열 살까지 팥떡을 생일상에 올려야 아이가 건강히 자란다'는 이야기를 듣고선 '팥단지'도 꼬박꼬박 아이 생일상에 올렸다.

승묵이 얼굴이 손에 잡힐 듯 아른거리던 순간, 영석 엄마에게 오랜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아마 행사에 나오라는 용건이겠지. 설득해도 나가지 않을 걸 알면서 전화를 했네. 하지만 영석 엄마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때 그 담배, 승묵이 거였다며?"

영석이가 학교에서 담배를 압수당해 불려 간 적이 있는데, 나중에 실토하기로 승묵이가 준 것이라고 했단다.

"내가 승묵 엄마 대신 혼났잖아."

인숙은 담배 두 보루가 비었던 날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맞아. 승묵이가 그날따라 슈퍼로 엄마를 데리러 오며 큰 가방을 하나 가져왔었지.' 슬며시 웃음이 났다.


어른이 못 되고 떠나서 못 해본 것들이 많아 마음 아팠는데 해볼 건 다 해봤네?

아이를 잃은 두 엄마가 소리 내어 웃었다. 애들이 담배 피워본 게 위안이 된다니. 다들 미쳤다고 하겠네. 승묵이가 막 떠났을 때 한 친구가 "승묵이가 장난삼아 담배를 한 대 피워봤다"고 이야기했던 기억도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 순간 오랜만에 잊고 있었던 삼일마트가 생각났다. 그날 이후로 한 번도 가지 않았던 동네. 가장 행복했지만 가장 슬펐던 동네. 승묵이의 이름은 이을 승(承)에 잠잠할 묵(默)이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끈기 있게 이뤄나가라'는 뜻으로 지었지만, 누군가는 부모가 아이의 이름에 묵묵하다는 뜻을 넣어서 잘못됐다고도 했다. 인숙은 그게 아니라고 확인하고 싶었다.

"승묵아, 엄마 이제 한번 우물 밖으로 나가볼게."

엄마, 아빠들은 다시 한 번 힘을 내보기로 했다. 인숙도 거기 있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 전국 행진 '안녕하십니까'에 참여해 노란 우산을 지팡이 삼아 지난 4일 경북 안동시내 오르막길을 오르는 모습. 원다라 기자

엄마, 아빠들은 다시 한 번 힘을 내보기로 했다. 인숙도 거기 있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 전국 행진 '안녕하십니까'에 참여해 노란 우산을 지팡이 삼아 지난 4일 경북 안동시내 오르막길을 오르는 모습. 원다라 기자

인숙은 2월 25일부터 3월 16일까지 진행된 세월호 참사 10주기 전국 시민행진 전 구간 304㎞를 완주했다. 승묵이가 수학여행을 갔어야 할 제주부터 시신이 돼 돌아온 팽목항, 23개 도시와 지난 6년간 가지 못했던 안산을 거쳐 서울로 향하는 일정이었다. 길을 걸으며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아직도 기억해주는 시민들이 있다는 게 위안이 됐다.

그 길을 걷는 내내 집 안에 홀로 있을 병길이 떠올랐다. 작업복이 흙투성이가 돼 들어와도 하나도 힘들지 않은 양 씩 웃어 보이는 남편이지만, 인숙은 그가 4월이 다가올 때마다 어린아이처럼 입술을 떨면서 엉엉 울다 깨고 돌아눕는 것을 안다. 우리 승묵이 당신 탓이 아니라고, 원망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해 줬어야 했는데. 우리 남편 너무 외롭고 힘들었을 텐데.

긴 외출 끝에 병길이 기차역에 마중 나와 있었다. 인숙은 처음으로 그 말을 꺼냈다.
"내가 승묵이와 마지막으로 통화했더라도 당신처럼 이야기했을 거야."
병길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인숙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아들을 잃은 후 10년만에 안산 단원구 삼일마트 자리를 찾은 은인숙 강병길 부부가 손을 꼭 잡고 걷고 있다. 한국일보

아들을 잃은 후 10년만에 안산 단원구 삼일마트 자리를 찾은 은인숙 강병길 부부가 손을 꼭 잡고 걷고 있다. 한국일보


그래픽=김대훈 기자

그래픽=김대훈 기자


또 다른 월피동 주민 장훈의 명함 두 개

2018년, 그해 월피동을 떠난 건 인숙 부부만이 아니었다. 장훈도 보금자리를 일산으로 옮겼다. 33년 동안 살며 4남매를 키웠던 동네를 벗어난다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식들을 지키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맏이인 준형이가 여객선 참사로 세상을 떠난 뒤 동생들은 쏟아지는 비방과 억측에 상처 입으며 겨우 버티고 있었다.

병길이 그랬듯 장훈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려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일산으로 이사한 뒤 그는 주류 유통업체에서 일한다. 1.3톤 트럭을 몰고 고양과 은평 일대 식당에 소주와 맥주를 배달한다. 아픈 두 무릎에 보호대를 차고 매일 박스 100여 개를 나른 지 꼬박 1년 반이 됐다.

사실 장훈에게는 명함이 하나 더 있다. 거기엔 '연구소장'이라는 직함이 쓰여 있다. 집 근처에 8평 남짓한 연구실도 마련했다. 보기만 해도 두통이 생길 것 같은 보고서와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는 공간이다. 연구소장은 장훈에게 여전히 어색한 자리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이기도 하다. 6년 전 스스로 과학자가 돼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날을 장훈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3회에서 계속 / 4월 16일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에서 공개됩니다.>

☞<세월호 참사 10주기-그날의 책임자들, 저울은 공정했을까> 인터랙티브 콘텐츠 보기 https://interactive.hankookilbo.com/v/sew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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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다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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