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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원의 행복, 추억 담긴 '잔술'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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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원의 행복, 추억 담긴 '잔술'이 돌아온다

입력
2024.04.06 04:3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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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90년대 가난한 서민 위안 돼줘
싸고, 애환 곱씹고, 情 위해 명맥 이어
정부, 이달부터 잔술 판매 허용하기로
비판여론도 있지만... 어르신들은 반색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부자촌은 요즘 보기 드물게 잔술을 파는 노포 술집이다. 3일 오후 부자촌 가게 앞에 양은 막걸리 잔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이서현 기자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부자촌은 요즘 보기 드물게 잔술을 파는 노포 술집이다. 3일 오후 부자촌 가게 앞에 양은 막걸리 잔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이서현 기자

손민익 시인은 시 '잔술 한 잔'에서 '천 원짜리 한 장 놓고 / 또 잔술 한 잔 하시게 / (중략) / 그대 / 가라면 못 갈 / 구비구비 힘든 세월의 흔적들을'이라고 썼다. 배고프고 힘들고 모든 게 부족했던 옛 시절, 우리들은 술 한 잔에 고단함을 날려 보냈다. 시간이 흘러 궁핍은 풍요로 바뀌었고, 잔술 파는 술집과 포장마차 역시 사라졌다.

그랬던 추억 속 잔술이 다시 서민들의 어깨를 토닥일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정부가 이르면 이달부터 소주 등 모든 주류의 잔술 판매를 허용하는 내용을 법에 못 박기로 한 것이다. 물론 시대가 변한 만큼 반응은 극과 극이다. 한쪽에선 낱잔으로 파는 술이 무슨 쓸모가 있겠냐고 입을 비쭉거린다. 그래도 잔술에 담긴 애환을 곱씹는 이들에겐 왠지 모르게 반가운 소식이란다.

"그땐 그랬지"

"막걸리 하나 계란 두 개 줘. 여기 2,000원."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노포술집 '부자촌'. 해가 지려면 한참 남았지만, 이곳은 벌써부터 왁자했다. '막걸리 소주 한 잔 1,000원' 현수막 뒤로 어르신들이 계속 밀려들었다. 50대부터 80대까지 나이도 제각각, 사연도 천차만별이다. 일 마쳤다고 한 잔, 점심 먹고 입가심으로 한 잔, 산책 나온 김에 한 잔.

공통점은 주전자에서 '꼴꼴꼴' 딸려 나온 막걸리·소주를 한잔 털어 넣고 뱉는, "캬~" 하는 감탄사다. 멍하니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한 어르신이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1,000원 한 장을 꺼낸다. "여도 먹고 싶나 보네. 한 잔 줘. 내가 살라니까."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노포 술집 부자촌에서 한 어르신이 계란을 안주 삼아 잔술을 먹고 있다. 이서현 기자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노포 술집 부자촌에서 한 어르신이 계란을 안주 삼아 잔술을 먹고 있다. 이서현 기자

야구모자에 배낭을 멘 모습으로 나타난 서성춘(70)씨는 잔술 마니아다. "에이, 곤지암까지 갔는데 비가 와서 공쳤어. 막걸리 하나 줘." 철근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그는 매일같이 도봉구 쌍문동 집에서 지방으로 출근한다. 빼먹지 않는 일상은 이곳에 들러 막걸리 잔술을 먹는 것이다. 잔술의 매력이 뭐냐고 거창하게 물으니 퉁명스러운 답이 돌아온다. "싸니까 먹는 거지 뭐."

그의 잔술 사랑은 상경한 1969년 시작됐다. "시골에서 지게 지던 내 얼굴은 시꺼먼데, 서울 간 놈들은 하얗더라고. 올라가자고 결심했지." 서울살이는 너무 고됐다. 접착제 사업은 사기를 당해 폭삭 망했고, 그 뒤로 공사판을 전전했다. 밥은 고사하고 몸을 누일 보금자리 하나 없었다. "1월에도 다리 밑에서 덮개 하나만 덮고 잤어.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기적이지."

세상을 등질까 고민한 적도 여러 번. 그때마다 위로가 돼 준 게 잔술이었다. "힘드니까 돈 모이면 소주 한 잔, 라면땅 이렇게 사 먹었지. 2,000원이면 충분해." 서씨는 이제 잔술을 안 먹어도 된다. 먹고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고, 쌍둥이 손자들과 노는 시간이 제일 즐겁다. 그러나 잔술 버릇만큼은 버리지 못했다. "내 고통의 시간과 함께한 그립고 고마운 존재, 그게 잔술이야."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싸고 추억만 되새기려 잔술을 찾는 건 아니다. "여긴 정(情)이 있어." 막걸리 한잔 들이켠 뒤 계란껍데기를 까던 A씨가 말했다. 그는 탑골공원 전에 종묘공원이 어르신들의 '핫 플레이스'이던 시절을 떠올렸다. "전국에서 몰려왔어. 다들 며느리나 아들한테 2, 3만 원 용돈 받고 오는 거야." 당시 공원에는 막걸리·소주 잔술과 커피 파는 중년 여성들이 즐비했고, 손님과 격의 없이 지내다 보니 거리낌 없이 외상으로 사 먹었을 때도 많았다고 한다.

그때도 잔술 가격은 1,000원밖에 안 됐다. 다만 지금보다 잔 크기가 3배는 더 컸다. "긴 의자에 앉아 있는데, 누가 막걸리 잔술이라도 먹으면 다 쳐다본다고. 그러면 그냥 1만 원 내고 한 잔씩 다 돌리는 거야." 그런 게 정이라고 했다.

"잔술 무죄!"

장년층의 기억에만 있던 애환과 정의 대명사 잔술을 끄집어낸 건 기획재정부다. 지난달 20일 잔술 합법화 내용을 담은 '주류 면허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원래 칵테일, 맥주 외 주류를 잔 단위로 파는 행위는 불법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주세법에서 '출고된 술을 임의로 가공, 조작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잔 단위로 파는 위스키, 와인 등 소비가 늘면서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나왔고, 결국 잔술 판매도 허용하기로 한 것이다.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노포 술집 부자촌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한 손님이 잔술을 먹고 있다. 이서현 기자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노포 술집 부자촌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한 손님이 잔술을 먹고 있다. 이서현 기자

어르신들이야 반색하지만, 시큰둥한 반응도 많다. 특히 자영업자들은 서민 주류를 잔 단위로 파는 데 큰 이점이 없다고 손사래 친다. 서울의 한 대학가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B사장은 "술을 적게 먹는 요즘 젊은이들은 선호할 수도 있으나, 수요가 많지는 않을 것 같아 판매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소비자들은 위생 문제를 걱정한다. 직장인 정모(26)씨는 "가게에서 남은 술을 모아서 팔 것 같아 굳이 구매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고개를 저었다.

사실 지금껏 잔술을 판다고 잡아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는 시행령 개정이 잔술에 '무죄'를 선고한 것 같아 기쁘다고 했다. 백모(74)씨는 잔뜩 신이 나 기자와 막걸리 여섯 잔을 주고받으며 잔술에 얽힌 일화를 한바닥 늘어놓았다. 그러더니 손을 내밀며 마지막 한마디를 내뱉었다. "악수 한번 할까. 잔술 아니었으면 못 만났을 할아버지잖아."

이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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