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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아담의 재림

입력
2024.04.06 05:00
수정
2024.04.08 14:18
18면
0 0
최연진
최연진IT전문기자


5인조 가상 아이돌 그룹 플레이브. 블래스트 제공

5인조 가상 아이돌 그룹 플레이브. 블래스트 제공

얼마 전 서울 여의도 현대백화점에서 열린 일련의 행사들이 화제가 됐다. 바로 이세돌과 플레이브의 팬 미팅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세돌은 바둑기사가 아니라 '이세계아이돌'의 줄임말이다.

이들은 실존 인물이 아닌 컴퓨터가 만든 가상의 존재, 즉 사이버 아이돌이다. 2021년 데뷔한 이세계아이돌은 6명의 소녀로 구성된 걸그룹이고, 지난해 데뷔한 플레이브는 5인조 남성그룹이다. 각 구성원이 이름까지 갖고 있어 가상의 인격을 지닌 이들의 인기는 행사에 몰린 인파가 여실히 보여준다.

업계에 따르면 팬 미팅을 비롯해 약 한 달간 백화점에 설치된 임시 매장(팝업 스토어)에서 이들의 음반, 기념품 등 각종 상품이 50억 원 이상 팔린 것으로 전해진다. 현대백화점도 약 한 달간 10만 명이 가상 아이돌의 팝업 스토어를 다녀가 여의도점 매출이 7배 뛰었다고 밝혔다. 13일 서울올림픽공원에서 열리는 플레이브의 첫 공연은 예매 시작 10분 만에 매진됐다. 이는 방탄소년단(BTS)이나 아이유 등 최정상급 가수들에 버금가는 인기몰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팬의 연령대다. 과거 아이돌은 젊은 층 위주로 인기를 끌었으나 이세돌과 플레이브의 행사 현장에는 50대 이상의 아저씨, 아주머니도 곧잘 보였다.

업계에서는 가상 아이돌이 갖고 있는 특성을 인기몰이의 주된 이유로 본다. 사람처럼 늙지 않고 마약이나 스캔들 등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다. 또 한창 인기 있을 때 군 입대로 활동에 공백이 생기는 문제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이런 특징을 지닌 가상 인간이 처음은 아니다. 이들의 조상 격인 사이버 아담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인 1998년 데뷔해 불로장생의 특징을 가진 사이버 가수로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사이버 아담은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물론 컴퓨터 환경과 곡의 특징, 제작사의 지원 등 여러 요인이 요즘과 크게 다를 수 있다. 플레이브의 제작사 블래스트는 MBC 사내 벤처로 출발해 분사한 뒤 네이버 관계사 IPX의 투자를 받아 적극적으로 플레이브 활동을 지원한다.

사이버 아담과의 가장 큰 차이를 꼽자면 시대성을 빼놓을 수 없다. 과거와 비교해 비약적으로 발전한 디지털 기술, 사이버 공간을 실제 공간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요즘 세태 등은 사이버 아담 시절과 비교 불가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사이버 아담은 시대를 앞서간 셈이다.

하지만 가상의 존재들이 지나치게 기술력과 시대 상황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단적인 예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할 때 혜성처럼 등장한 로지라는 가상 인간이 있다. 컴퓨터로 만든 로지는 빼어난 외모를 앞세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큰 인기를 끌며 기업들의 광고 모델로 활동했으나 요즘 존재감이 없다. 전문가들은 늘 한결같은 가상 인간의 특징이 오히려 식상함을 불러일으켰다고 분석했다.

이를 의식했는지 요즘 가상 인간들은 의도적으로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플레이브는 구성원 하나가 성대결절로 당분간 휴식을 취하는 일종의 상황극을 만들어 로지와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인간의 결점까지도 끌어안으려는 것이 사이버 아담과 다른 요즘 가상 인간의 특징이다. 과연 이 땅에 다시 재림한 가상 인간들이 얼마나 청출어람(靑出於藍)의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최연진 IT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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