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이머시브 공연]
연극 '푸드'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관객참여 공연 인기
무대 객석 경계 흐려지고 관객이 직접 대사까지
VR·AR 등 기술 발달로 공연 형식 다양해져
2000년대 초반 문화를 접목한 도시 재생이 한창이던 영국에서 시작된 공연의 형태다. 극장이 아닌 곳이 무대가 되기도 하고, 무대와 객석 구분이 사라지며, 관객이 수동적 관찰자에 머무르지 않고 공연에 참여하는 게 특징이다. '이머시브(immersive) 공연' 이야기다. '이머시브'는 관객을 공연에 끌어들여 몰입감(immersion)을 높인다는 뜻이다.
독립된 장르로 토대를 다진 이머시브 공연이 다양한 형태로 진화 중이다. 공연의 현장성을 극대화한 이머시브 공연은 영상 콘텐츠에선 맛볼 수 없는 공연예술의 가치를 증명한다. 도파민 과잉 시대의 관객들이 공연장에서 신선한 자극 체험을 원하는 것도 흥행의 한 이유다.
수동적 관람은 가라, 관객이 말한다
"이 와인에서는요, 연애 6년 하고 결혼생활을 39년 한 남편하고 싸워서 꼴 보기 싫을 때 나는 냄새가 나네요."
최근 서울 강동아트센터에서 공연된 연극 '푸드'. 한 관객의 난데없는 고백에 객석은 웃음바다가 됐다. 미국 배우이자 연출가인 제프 소벨의 1인극 '푸드'는 이머시브 공연이다. 무대 위 대형 식탁에 둘러앉은 테이블석의 관객들은 웨이터 차림을 한 소벨의 지시에 따라 소품을 나르고 대사를 읊었다. "와인 향을 맡고 연상되는 경험이나 기억을 말해 달라"는 지문을 받아 든 한 관객이 함께 온 남편을 즉석에서 장난스럽게 공격했다.
요즘 이머시브 공연은 배우와 관객의 거리를 좁히는 데 그치지 않는다. 관객에게 대사를 주고 춤을 추게 한다. 2022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를 통해 처음 한국 무대에 오른 독일 창작그룹 '리미니 프로토콜'의 공연 '부재자들의 회의'도 관객의 대사로 완성됐다. 국제회의 연사들의 불참으로 관객이 연사들의 대리인을 자처해 회의를 이어간다는 게 공연의 설정. 즉석에서 참여 의사를 밝힌 관객이 무대로 나와 주어진 대사를 소화하며 공연을 이어 갔다.
지난달 개막한 이머시브 뮤지컬 '그레이트 코멧'에선 관객이 단역 연기자처럼 극의 진행을 돕는다. LG아트센터가 지난해 기획한 '차차차원이 다다른 차원'은 장례식의 조문객이 된 관객들이 배우들과 함께 춤을 춘다. LG아트센터 관계자는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놀라웠다"며 "이머시브 공연을 앞으로도 계속 선보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디지털 기술이 높이는 관객 참여도
기술 진화도 이머시브 공연의 진화를 이끈다. 2차원 영상,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이 관객 참여의 폭을 넓힌다.
지난달 개막한 라이선스 뮤지컬 '디어 에반 핸슨'은 영상을 통해 관객을 참여시켰다. 1막 후반에 무대 뒤편 스크린이 관객 참여 이벤트로 모은 주인공 격려 영상으로 가득 채워졌다. 제작사는 공연 개막 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영상 출연 신청을 받았는데, 선발 인원 50명을 뛰어넘는 수백 명이 응모했다.
지난해 여름 선보인 메타버스 이머시브 '고스트 인 더 씨어터: 비욘드 게임'은 메타버스 플랫폼 'VR챗'과 현실 공간에서 동시에 진행됐다. 관객은 VR 기기를 쓰고 19세기 영국 런던으로 설정된 가상 세계와 23세기 서울로 설정된 현실의 공연장에서 각각 참여했다.
극장의 폐쇄성 벗어나 현실 세계로
공연장을 벗어나 현실 공간에서 이뤄지는 장소 특정(Site-Specific) 공연도 인기를 끈다. 미국 뉴욕에서 2011년 개막해 10년 넘게 공연되다 다음 달 27일 폐막하는 '슬립 노 모어'가 대표적인 장소 특정 공연. 창고를 개조해 호텔 콘셉트로 만든 건물 전체에서 진행된다.
한국에도 상륙했다. 지난해 연극 '끝난 사람'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 카페에서 열렸다. 객석과 무대 구분 없이 관객이 자유롭게 이동하며 관람했다. 김서현 프로듀서는 "공연 관람보다는 흥미로운 체험에 방점을 찍었다"며 "관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할 아이디어를 계속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관건은 확장성이다. 엄현희 연극평론가는 "요즘 관객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어 이머시브 공연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이라면서 "다만 색다른 무대를 위해 극장 좌석 수를 줄여야 하고, 출연 관객을 관리할 스태프를 따로 둬야 한다는 점 등 때문에 수익 창출 면에선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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