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석수 따라 기호 부여하는 '기호 순번제'
중소 정당 "거대 양당에만 유리" 개혁 필요
VS "폐지 시 유권자 혼란" 법 개정 신중해야
#. 충북 충주시 국민의힘 소속 한 시의원은 5일 시내 한복판에 '일찍일찍 투표하삼'이라고 적힌 더불어민주당의 현수막을 낫으로 훼손했다. 이 시의원은 경찰 조사에서 '일찍'이라는 표현이 기호 1번인 민주당을 찍으라는 의미라고 항의했다.
#. MBC는 지난 2월 27일 날씨예보 방송에서 미세먼지 농도 '1'을 파란색으로 크게 표시했다가 특정 정당을 연상케 한다며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최고 수위 징계를 받았다.
22대 국회의원선거(총선) 과정에서 정당 기호를 둘러싼 논란이 불거지면서 '기호 순번제' 논의가 재점화했다. 기호 순번제는 선거에서 정당의 국회 의석수에 따라 기호를 부여하는 방식을 말한다. 해당 제도가 거대 양당에만 유리해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과 유권자 편의를 위해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하다.
의석수 따라 1, 2번? "거대 양당 유리"
군소 정당들은 기호 순번제 폐지를 주장한다. 김수영 녹색정의당 선임대변인은 8일 "투표용지에 기호를 넣는 것은 잘한 일도 없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늘 1번과 2번을 차지하는 거대 양당에만 유리한 제도"라고 주장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투표 용지에서 첫 순서를 차지해 '초두 효과(첫 정보가 기억에 잘 남는다)' 혜택을 누린다는 지적이다. 새로운미래도 정당 정책을 통해 기호 순번제를 추첨제로 바꿔야 한다고 밝혔다.
우리나라는 제헌의회 선거에서 추첨제를 시행했다가 1969년 기호 순번제를 도입했다. 이후 여러 차례 폐지와 부활을 거듭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정착돼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2010년 이명박 정부 당시 폐지가 논의됐지만 최종 입법 단계에서 무산됐다. 거대 양당 국회의원들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제도 개편이 쉽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기호 순번제가 평등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하는 헌법소원도 1996년부터 총 8차례나 진행됐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합헌 결정을 일관하고 있다. 헌재는 2020년 진행된 헌법소원 심판에서 "정당과 의석수를 기준으로 한 기호 배정이 소수 의석 정당, 의석이 없는 정당, 무소속 후보자에게 상대적으로 불리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정당 제도의 존재 의의나 선거 운영 등을 고려할 때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다.
여야 '의원 꿔주기'… 비례도 앞 순번 경쟁
앞 순번을 차지하기 위해 속칭 '의원 꿔주기' 등 꼼수도 난무한다. 특히 거대 양당의 위성정당 비례 순번 경쟁이 치열하다. 각 당은 현역 의원들을 제명해 위성정당에 파견해 의석수를 늘린 후 유리한 기호를 선점한다. 이번 총선에서도 더불어민주연합은 민주당 등에서 의원 14명을, 국민의미래는 의원 13명을 지원받아 각각 기호 3번과 4번을 차지했다.
기호를 활용한 선거 구호 경쟁도 과열됐다. 여권은 올해 총선에서 조국혁신당의 '지민비조'(지역구는 민주당, 비례는 조국혁신당)에 맞서 '이판사판'(지역구는 2번 국민의힘, 비례는 4번 국민의미래) 구호를 내세웠다. 4년 전 21대 총선에서 민주당과 위성정당 더불어시민당은 투표일(15일)을 민주당 기호 '1'과 시민당 기호 '5'로 새긴 정당 버스를 선거 운동에 사용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시정 요구를 받았다. MBC는 총선 사흘 전 방송 예정이었던 예능 프로그램 '복면가왕' 9주년 특집 방송을 일주일 뒤로 연기했다. 조국혁신당 기호(9번)를 연상시킨다는 우려 때문이다.
각 정당이 기호 선점에 열을 올리는 까닭은 앞 순번이 선거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국회입법조사처가 발간한 보고서는 "선거 정보와 관심이 적은 유권자일수록 위 번호를 선택할 확률이 높다"며 "지지할 정당이 분명한 유권자도 그 정당이 상위에 있다면 투표 선택이 보다 용이해진다"고 분석했다. 올해 총선 비례투표 결과에 따르면 앞 순번에 배치된 거대 양당이 차지한 의석수는 전체 46석 중 32석(69.6%)이다.
무작위 추첨·순환 배열·수기 작성도
해외는 다양한 방식으로 투표용지 순서를 배정하고 있다. 미국 콜로라도주 등 10여 개 주는 선거 때마다 추첨을 통해 기호를 정한다. 캘리포니아주 등은 투표구별로 순환 배열하는 방식이다. 영국은 후보자 성(姓)을 기준으로 알파벳순이다. 일본은 아예 유권자가 투표용지에 지지하는 후보자 이름을 직접 적는 '자서식'(自書式) 투표를 고수하고 있다. 국내 전국 교육감 선거도 2014년부터 공정성 확보를 위해 선거구별로 후보자 기재 순서를 바꾸는 '교호 순번제'를 시행하고 있다.
다만 기호 순번제 존폐를 둘러싼 전문가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김만흠 한성대 석좌교수는 "기호 순번제는 정당 정치에 대한 보호가 아닌 '거대 정당에 대한 특혜'로 작용할 수 있다"며 "헌법의 취지에 비추어봤을 때 원칙적으로 불공정한 제도"라고 법 개정을 주장했다.
유권자 편의를 위해 법 개정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윤종빈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순번 갈등을 막기 위해 TV토론회 참가 기준처럼 특정 득표율 이상을 얻은 비례 정당들에 한해 추첨제 배정을 시도해볼 순 있다"면서도 "정당과 한 몸으로 정책을 만들어야 하는 지역구 후보는 기호 없이 투표하게 되면 유권자가 헷갈릴 것"이라고 했다.
허석재 국회입법조사처 조사관은 "정당 간 불평등, 유권자의 불편 사이에서 공익을 따져 판단해야 한다"며 "기호 순번제로 인한 특혜를 줄이고 다양한 정치 세력이 선거에 참여하는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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