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복연-전철수 모자의 기구한 운명]
어머니는 6·25 때 빨갱이 누명 쓰고 불법구금
그사이 아들은 고아원행... 43년간 이산가족
1993년 상봉... 아들은 어머니 명예회복 계속
때는 1993년 6월 24일. 경남 거제에서 아파트 관리원으로 일하던 전철수(당시 48세)씨의 눈길이 한 일간지 박스기사에서 멈췄다. '김복연'이라는 할머니의 기구한 운명을 소개한 기사였다. 김씨는 6·25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에 쫓기는 국군을 도왔지만, 나중에 되레 북한군 부역자로 몰려 감옥에 갇혔다고 했다. 김복연에겐 잃어버린 아들이 있다고도 했다.
불현듯 철수씨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번쩍 스쳐갔다. 기사에 이런 내용도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취조실에 5세 아들(전학철)이 따라와 엄마에게 창을 찌르는 취조관을 붙들고 울었다. 취조관은 아이를 밖으로 내던져 버렸다. 이들 모자가 함께한 마지막 순간이었다.'
사연 속에 나오는 '전학철'이란 이름은 달랐지만, 철수씨는 43년 전 자기가 겪은 일이었다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저 김복연이라는 분은 나의 어머니인가. 고민 끝에 철수씨는 신문에 적힌 전화번호에 연락을 넣어 "서울서 만나자"는 뜻을 전달했다. 김복연씨를 만나 서로 기억의 조각들을 맞췄다. 역시 어머니가 맞았다.
철수씨는 원망하듯 어머니에게 물었다고 한다. "왜 그동안 저를 안 찾으셨나요?" 그랬더니 어머니는 놀라운 사연을 털어놓았다.
43년 헤어진 기구한 모자의 운명
기구한 운명의 시작은 1950년 10월. 서른두 살 복연씨가 북한의 남침 탓에 피란을 갔다가 서울로 돌아온 때였다. 복연씨는 별안간 경찰서로 끌려갔다. 대통령 선전물을 제작한 사람들을 인민군에게 밀고했다는 혐의였다. 복연씨가 피란으로 집을 비운 사이, 그 집에 몰래 들어와 살던 사람들이 신고를 넣었다고 했다.
혐의를 부인했지만 고문이 이어졌다. 결국 '비상사태하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라는 이상한 법을 위반했다는 점이 인정되어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특별조치령은 단심제라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복연씨가 수사받는 동안 경찰서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아들 학철(철수씨)은 전쟁고아 수용소에 보내졌다. "착하게 있으면 데리러 오신다"는 말만 믿다가, 1·4후퇴로 제주보육원에 이송되면서 이산가족이 됐다. 학철의 이름은 '맹철수'가 됐고, "눈물이 마를 정도로" 구타에 시달리며 엄마 기억은 잊어버렸다.
복연씨는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아들을 떠올렸다. 병세로 형집행이 정지된 틈을 타 신분을 숨기기 위해 새 가정을 꾸렸지만 10년 만에 발각됐고, 재복역 중 감형돼 1973년에서야 출소했다.
그사이 철수씨는 보육원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전국 공사판을 돌았다. 혈혈단신 철수씨는 어딜 가나 부랑자 취급을 받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엄마와 아들은 1983년 KBS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도 나갔지만, 기억하는 이름∙사연이 달라 서로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영영 만나지 못할 것 같던 모자 상봉의 기회는, 이별 43년 만에 찾아왔다. 75세 노파가 된 복연씨가 TV에 출연해 "빨갱이라는 누명을 벗기 위해 내가 도움을 줬던 국군 청년을 찾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이 사연이 실린 기사를 기적적으로 아들이 보게 됐다.
어머니 명예회복 시작한 아들
어머니는 아들을 버리신 게 아니었다. 진실을 안 철수씨는 그때부터 어머니 명예회복에 나섰다. 혼자 재판을 준비했다. 일을 그만두고 국립중앙도서관, 검찰, 법원을 들락거리며 기록을 모으고 판례를 뒤적여 재심을 청구했다. 자신의 성도 '맹철수'에서 다시 '전철수'로 바꿨다.
그러나 3년간 이어진 소송의 결과는 기각이었다. 암 투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던 철수씨는 "일단 좀 쉬자"며 어머니를 위로했다. 결과에 크게 낙심한 복연씨는 이후 가까운 지인에게 사기를 당하고 치매를 앓다 2010년 세상을 떠났다.
무죄를 받지 못하고 어머니가 떠나자, 아들의 가슴엔 후회가 사무쳤다. 그래서 다시 힘을 내, 2017년엔 변호사들 도움을 받아 재심을 청구했다. 그리고 4년 뒤 어머니의 면소(형사소송의 소송조건이 결여되어 기소를 면제하는 것) 판결을 받았다. 법원은 검사의 증거만으로는 복연씨 혐의를 인정하기도 부족하다고도 판단했다.
이를 근거로 철수씨와 이부 동생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체포 권한 없는 대학청년단에 의한 체포 △위법 영장 집행 △구금 중 가혹행위 △보육원 강제 입소 △부당 수사 △특별조치령 폐지로 면제돼야 하는 잔여형 집행 등 이유를 달아 22억 원을 청구했다.
'부당한 유죄' 인정 안 한 법원
사건을 심리한 서울중앙지법은 지난해 6월 청구 이유 중 '위법 영장'과 '가혹행위' 부분만 받아들였다.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또 당시 원고들이 아주 어렸거나 태어나기 전이었다는 이유로, 그들의 정신적 손해에 대한 위자료를 인정하지 않았다.
'불법구금과 고문이라는 불법행위가 있었지만 기소·재판·형집행은 모두 합법이고 국가가 부담해야 할 책임은 복연씨에게만 국한된다'는 결론이었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철수씨는 "43년간 개같은 인생을 살게 만들어 놓고 이런 판결로 만족하라는 거냐"며 항소했다. 하지만 지난달 27일 나온 2심 판단도 유사했다. 그가 고아로 살아온 40여 년 세월과 복연씨가 생전 겪었던 고통이 좀 더 참작돼 인용 금액이 약 2억 원으로 늘어났을 뿐이었다.
이제 여든을 바라보는 철수씨는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소송(대법원 상고심)을 준비한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어머니에게 가해진 유죄 판결, 철수씨 스스로가 부당하게 당해야 했던 고아 대접의 책임을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다. 법률대리를 맡은 장경욱 변호사는 "1·2심은 이 사건이 일련의 불법행위라는 점을 간과해 위자료를 크게 감액했다"면서 "국가에 의해 '간첩'으로 낙인찍힌 복연씨 가족에 대한 피해가 적극 인정돼야 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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