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반도체 생태계의 진화
인류 미래 좌우할 '넥스트 실리콘'
2D 물질로 반도체 성능 향상 가능
메가 슈퍼컴으로 가볍게 AI 구동
오류 없이 완벽한 양자컴 기대도
편집자주
AI와 첨단 바이오 같은 신기술이 인류를 기존 한계를 넘어서는 초인류로 진화시키고 있습니다. 올해로 일흔 살이 된 한국일보는 '초인류테크'가 바꿔놓을 미래 모습을 한발 앞서 내다보는 기획시리즈를 총 6회에 걸쳐 보도합니다.
인공지능(AI) 구동에 필수인 데이터센터는 '전기 먹는 하마'로 불릴 정도로 전기를 많이 쓴다. 마이크로소프트, 오픈AI, 테슬라 같은 글로벌 빅테크들이 앞다퉈 에너지 개발에 대규모 투자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처럼 전력 소모가 많은 컴퓨팅 기술을 계속 쓰다가는 자칫 인류의 생존까지 위협받을 수도 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컴퓨팅에 들어가는 에너지 소모를 1,000분의 1 이상으로 크게 낮춰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려면 데이터를 저장하고 처리하는 반도체의 근본적 한계를 넘어야 한다. 삼성전자와 대만 TSMC 등 반도체 기업들은 이 난제를 해결할 열쇠로 2차원(2D) 물질을 들여다보고 있다. 공고한 실리콘 자리를 이 신물질이 대체한다면 전력 소모를 수십, 수백 배 낮추는 방향으로 반도체의 진화를 이끌 거란 전망이다. 이병훈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교수는 "2D 물질을 실리콘과 결합하는 등 여러 방법을 통한다면 가능할 것"이라며 "AI를 누구나 가볍게 쓰고, 데이터센터도 에너지를 덜 잡아먹게 될 수 있다"고 예상했다.
2D 물질 같은 신소재가 '넥스트 실리콘'으로 자리 잡을 미래에는 에너지 걱정 없이 무한한 컴퓨팅 파워를 이용하는 엄청난 편리가 찾아올 거라는 기대다. 그때가 되면 지금의 슈퍼컴퓨터 계산 속도를 훨씬 뛰어넘는 '메가 슈퍼컴'이 일상 속에 들어올 것이다.
균열 시작된 실리콘 천하
전자제품의 발전은 '반도체 칩'의 발전과 같다. 정보 처리 속도나 데이터 저장 능력을 좌우해서다. 지금의 칩은 실리콘 웨이퍼(기판) 위에 트랜지스터를 비롯한 전자소자(전자회로를 구성하는 부품이나 장치)를 무수히 많이 새겨 넣는 식으로 발전을 거듭해왔다. 트랜지스터를 작게 만들어 욱여넣으면(집적도를 높이면) 전자들이 짧고 빠르게 이동할 수있고, 필요한 전력도 줄어든다. 칩이 발전할 때마다 더 빠르고 발열이 적은 전자제품이 등장해온 것도 이 덕분이다.
눈부신 변화 속에서도 반도체의 기본 소재인 실리콘은 수십 년간 자리를 지켰다. 거듭된 성능 개선에도 반도체의 기본인 디지털 언어(0, 1)를 잘 구현하는 것은 물론, 비용 면에서도 더 나은 대체재가 없었다. 그러나 집적도를 더 끌어올리려고 미세화에 몰두하던 반도체 업계는 한계에 부딪혔다. 어느새 우리가 사는 세계와 달리 양자물리 법칙을 따르는 나노 세계를 침범했기 때문이다. 회로를 따라 흘러야 하는 전자들이 길을 벗어나는(양자 터널링 효과) 등 실리콘이 제 기능을 잃어버리면서 오작동까지 생겼다. 트랜지스터 구조를 바꿔보거나 아예 칩을 계속 이어 붙여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만드는 식으로 대응하고는 있지만, 근본적 한계는 여전하다.
2D 물질+실리콘=세상에 없던 반도체
원자 한 겹으로 이뤄진 2D 물질은 우리 주변 3차원 물질을 얇디얇게 자른 것과 같다. 두께가 원자 하나 수준으로, 1나노미터(머리카락 굵기의 10만 분의 1)가 채 안 된다. 이런 물질들은 안정된 표면 구조로 독특한 양자 특성을 갖고 있어, 3차원일 때와 물리적 성질이 크게 다르다. 대표적인 2D 물질이 3차원 흑연을 스카치테이프로 떼어내는 과정에서 발견된 '그래핀'이다.
반도체 업계가 2D 물질에 눈독 들이는 건 집적도의 한계를 넘을 수 있어서다. 신현진 광주과학기술원(GIST) 반도체공학과 교수는 "2D 물질은 그 자체가 나노미터 크기이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미세한 공정이 적용돼도 물성이 변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즉 반도체 소재를 실리콘에서 2D 물질로 바꾸면 더 작은 트랜지스터를 더 많이 집어넣어 칩 성능 향상을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2D 물질은 공정 온도가 낮고, 3차원 집적이 용이하다는 점에서 뉴로모픽 반도체를 구현하는 데도 유용한 재료로 평가받고 있다.
반도체 소재로 가장 먼저 주목받은 2D 물질이 바로 그래핀이었다. 강도가 철의 200배, 전도성이 구리의 100배라는 놀라운 특성 때문이다. 하지만전기가 통해도 너무 잘 통하는 탓에 전류의 흐름을 조절할 수 있게 만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용화 문턱을 넘지 못한 상황이다.
저비용, 대량생산이 관건
학계에선 또 다른 2D 물질인 이황화몰리브덴(MoS2)의 가능성을 높게 점치기 시작했다. 전압에 따라 전기가 통했다 안 통했다 하는 반도체라 칩이 될 수 있는 기본 조건을 갖췄고, 전기적 속성도 좋다. 안종현 연세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다른 소재보다 안정적인 데다 웨이퍼 사이즈로도 만들 수 있어 산업성이 있다"면서 "열도 잘 방출하기 때문에 냉각이 덜 필요해 전자제품의 효율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상용화를 위한 저비용·대량생산이 쉽지 않을 거란 문제가 있다. 신 교수는 "(제품에 신소재를 적용하려면) 기존 공정과의 호환성, 시장의 수요와 요구 시점 등을 총체적으로 봐야 하는데, 학계에선 한계가 있다"면서 "IMEC(유럽의 반도체 산업 연구기관)같이 연구 내용을 실제 공정에 적용해보는 등 학계와 산업계를 잇는 다리가 필요하지만, 한국은 산·학·연이 각개전투하기 바쁜 게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또 이미 수십 년간 탄탄하게 굳어져온 실리콘의 자리를 다른 물질이 대체하기까지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릴 거란 관측도 적지 않다.
노화 넘어 불멸의 신약까지?
2D 물질은 양자컴퓨터를 실현시킬 주인공으로도 기대를 모은다. 일반 컴퓨터는 네 자리 비밀번호를 알아맞히려 할 때 1만 개 경우의 수를 하나씩 입력해보는 식으로 작동하는데, 양자컴퓨터는 양자 세계의 법칙을 이용해 확률적으로 계산한 뒤 답을 내놓기 때문에 훨씬 빠르고 효율적이다. 그러나 양자컴퓨터의 계산 도구인 '큐비트'를 아직은 만들기도, 다루기도 어려워 영하 200도 이하 같은 극한 환경에서만 제한적으로 구현된다.
보편적인 환경에서 오류 없는 양자컴퓨터를 만들기 위해선 표면에는 전기가 흐르지만 내부에는 흐르지 않는 '위상절연체'가 필요하다. 학계나 업계에선 2D 물질이 위상절연체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2019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카이스트) 연구진이 그래핀을 두 겹으로 겹쳐 비틀었을 때 위상절연체가 된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기초연구 수준이라 갈 길이 멀다.
완성도 높은 양자컴퓨터로 상상 가능한 미래는 무궁무진하다. 실질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던 계산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클라우드 기술을 적용하면 동시에 많은 사람이 양자컴퓨터를 이용할 수도 있다. 이순철 카이스트 물리학과 교수는 "양자컴퓨터를 신약개발에 이용하면 수많은 원자들의 조합을 짧은 시간 내에 시뮬레이션해볼 수 있다"면서 "개인화한 약을 그때그때 만들어낼 수 있게 돼 노화를 넘어 불멸을 가능하게 하는 약까지 나올지도 모른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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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반도체 생태계의 진화
<2>안 아프고 100세까지
<3>어디서나 전기 쓴다
<4>AI 대 AI, 인간 대 AI
<5>통신, 경계가 사라지다
<6>에필로그 : '서아의 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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